세상에 공짜는 없다.

오늘 우연히 마크라는 사람의 글을 봤다. 과정의 고통을 수용할 용기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결과에 대한 상만 동경하고 과정의 고통을 견디려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지만, 그의 독특한 직설적 화법이 충격을 주었다. 난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었던 게 아닐까. 그게 현재 내가 지지부진한 이유다.  아래는 나의 뒤통수를 정신 번쩍 나게 때렸던 마크의 글의 링크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nny_j_lee&logNo=220598065665&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Posted in Monolog,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원효의 화쟁사상과 통불교론이 불편한 이유

한국사람 치고 원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원효가 묘지에서 썩은 물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이해는 잘 안가도 교과서에서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화쟁사상을 주창했다는 것을 배웠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특히 한국불교에서 원효는 공부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원효는 한국적 불교인 통불교를 성립시킨 한국불교의 종조로 추앙받기도 했다. 원효 사상의 심오함에는 동의하지만, 원효와 화쟁사상과 통불교론을 볼 때마다 무언가 불편하다.

오랫동안 불교학계에서는 원효를 화쟁사상의 틀에서 해석해왔다. 물론 원효가 화쟁적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걸 그의 독특한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두 대립 사상, 또는 다양한 의견의 통합 노력은 동서 사상사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가까이는 불교내의 지의도 그랬고, 종밀도 그랬고, 멀리는 칸트마저도 두 가지 방법론의 종합화를 추구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독자적 사상이라 칭송할 수 있는 것일까?

원효의 화쟁 사상이 다른 통합적 사유와 차별이 되려면, 화쟁 사상 자체의 차별적 논리가 있어야 한다. 박종홍은 이를 개합의 논리, 입파와 여탈의 논리라하며 특수성을 부여했지만, 솔직히 난 그걸 독자적 통합의 논리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학자들이 일심에서의 통합이라는 주장은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그 독창성에는 의문이다. 이에 기반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통불교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어느 불교가 통불교가 아닌 게 있으며, 어느 종교가 통종교가 아닌게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 조차도 초기에는 기존 토착종교의 이야기나 사상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통불교론의 허구성과 그 저변에 깔린 민족주의가 비판되어왔다. 폭넓게 공부하다보면,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글로벌주의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는 로버트 버스웰이 제시하는 범아시아론의 맥락에서 한국불교를 재조명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일 수 있다.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내놓아야 한다는 한국불교계의 간절함은 이해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한국불교를 더 우습게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여전히 강세인 원효의 화쟁사상과 통불교, 나아가 화쟁사상을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로 여기는 상황이 내게는 참으로 불편하기만 하다.

Posted in Buddhism, Uncategorized | Tagged , , , | Leave a comment

사드배치와 한반도 평화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냉전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른바 신냉전시대가 오고 있다.

사드배치가 한국가 중국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 분명함에도, 한국정부는 이를 강행하려는 분위기다. 현 한국정부의 요근래의 외교정책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한숨만 나온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정부의 행동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선거를 위해 보수층 집결을 위한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이 말에 일정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있었던 정신대 관련 일본과의 합의문도 그렇고, 북한 위성/미사일 발사 직후 미국의 반응도 그렇고, 개성공단의 운영정지 뒤 미국과 일본의 환영선언을 봐도 그렇고, 이건 미국의 대중국견제의 욕망에 남한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미국은 언제나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가 미국은 우방이며 자유민주주의 지원하는 국가이므로 우리를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다. 한국문화에는 의리와 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는 분위기가 존재하는데, 그건 순진함을 넘어선 무식의 소치이다. 미국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국제 사회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전쟁이 나면 당연히 미국이 도와주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방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북아 패권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를 이야기한다해도 그건 수사학일 뿐이다. (그 가치를 믿으며 지키려는 성실한 개개의 미국인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시작부터 그 땅에 사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건설된 국가이며, 흑인의 인권을 인정한지 수십년밖에 안된 국가다. 체재의 안정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지원한 독재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미국은 한국의 군사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쿠테타정부라 할지라도 한국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미국의 구미에 맞추는 적합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명분은 북한의 공격에 대한 남한과 미국군의 보호이라고 하지만, 이번 사드 설치에는 미국의 중국감시 의도가 숨겨져 있다할 수 있다. 이미 몇몇 학자들이 말했듯이 사드는 북한의 남한 공격을 방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드의 설치를 원하는 것은 사드를 통해 중국과 북한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미국 본토 공격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국가 수립 후 외국의 공격을 받은 것은 태평양 건너 일본이었다.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만약 중국이 태평양을 건너 공격하려 한다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 같다. 덧붙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냉전인식틀에 기반한다. 중국이 비록 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도입했다 하더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팽창은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수용되는 것 같다.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미국의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일까?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기에 정권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받지 못할 경우, 미국의 암묵적 승인에 의해 정권을 유지해온 역삭가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와 달리 현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절반의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이다. 당선 이후 선거부정 논의가 끊이지 않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되지마자 전면적으로 선거공약을 뒤집고, 이어 일어난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무능력과 무책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일방적인 4차원적 소통법(사실은 불통)은 국민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지율이 30-40%를 오간다는 것은 이 정부이 정당성이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서 정부에서 암묵적 승인을 거두는 결정을 한다면, 그 파장은 클 것이니 당연히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다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의 위기의 고조는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니, 현 정권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일단은 좀 더 주체적인 정부를 만든는 게 중요할 것이다.  총선과 대선에서 바른 대표자를 뽑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미국의 동북아 패권 욕망을 내려놓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에게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 강요해왔던 불합리한 처사들, 예를 들어 이승만 정권 수립을 도와준 것, 친일파 청산 기회를 없애버린 것, 냉전이데올로기로 백만의 양민 학살에 가담하거나 묵인한 것,  독재 정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 정신대 합의를 하게 했던 것 등등을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사실을 제대로 알림으로써 동북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생각한다. 미국이 한국 상황에서 손을 뗄 때,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in Korean society, Uncategorized | Tagged , , , , , | Leave a comment

[book] 고독한 한국인_강준만

흥미로운 책이다. 한국인의 주목투쟁, 이중성, 자리욕심, 순결주의, 지도자 추종주의, 나르시즘 등의 문제를 노무현 정부의 정책비판과 노무현, 유시민, 이문열에 대한 비평에 녹여내고 있다. 사실 그런 글들을 ‘고독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묶은게 매우 인상적이다.

나는 노빠는 아니었지만, 노무현 지지자였고, 노무현 정부의 문제가 분노의 정치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노무현 정부의 문제가 그 이상으로 심각했었음을 내게 알려주었다. 인간 노무현의 편의주의적 순결주의.. 라는 표현에 매우 공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변의 도움으로 순결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도 주변의 움직임으로 순결함을 지킬 수 있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자금 담당자였고, 그래서 실형이 선고되었으나 결국 풀려났다는 이야기에서는 솔직히 실망감이 몰려왔다. 호남인들의 표로 대통령이 되고 영남 바라기를 통해 호남인들을 무시했던 노무현 대통령. 권위를 내려놓는다고 하면서도 낙하산 인사(코드인사) 를 400명  지명하여 내부자들의 자리욕심을 자극하며 내부비판의 가능성을 없앴던 대통령. 국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는데, 낙하산 인사들의 월급인상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했던 대통령. 왜 사람들이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을 미워하고, 친노를 미워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동안 내가 노무현 정부의 문제점에 대해서 모르면서 일명 수구 보수세력만을 진영논리에 따라 보고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나 자신을 자시 돌아보게 해주었다. 나는 단지 저들이 진보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글쓰기의 욕심은 주목받고 싶은 강한 욕구의 발로가 아닐까, 나 또한  스스로 이타적이라 착각하며 이기적 행동을 하고 있었던 적은 없던가, 스스로가 옳다고 순결한 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식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 글을 다 읽고 난 후에 정치에 대한 과잉관심이 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 모두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집권층의 핵심은 이기적 패거리 주의. 그건 진보네 보수네 하는 구분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동일한 것이며, 그들에게 이념은 대부분 장식이고, 삶은 그 이념과는 괴리된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답답함과 원망도 사라졌고, 조용한 국민들에 대한 불만도 사라졌다. 국민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있는 거였다. 정치인들도 사람이므로 국민이 해야할 것은 어느 특정 인기인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촘촘한 제도를 통해 정치인들을 통제하는 것, 그것만이  한국의 정치가 바로 서고,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해야하는 것뿐이다.

Posted in Uncategorized | Tagged , , , , , | Leave a comment

시사풍자와 정치 개그

오늘 피터님의 정치풍자 코미디에 관한 글을 읽다가 한국 정치개그의 변화가 일베의 탄생에 기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http://impeter.tistory.com/2829)

정치풍자코미디의 전성시대는 참여정부 시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이 즐거워 한다면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코미디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 근데 그 당시 김형곤은 시사풍자는 사라지고 스토리도 없고 감각적 개인기에 의존한 코미디만 존재한다며 당시 상황을 한탄했다고 한다. 이게 좀 모순된 진술이긴 한데, 김형곤의 지적이 보여주는 것은 당시 시사풍자를 할 만한 시사적 이슈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시사풍자는 억압이 있을 때  권력자의 탄압이 두려워 에둘러 표현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탄압이 없으면 그 공감대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참여정부 시대에는 정치적 이슈를 대화로 풀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 이야기하고 공론화하여 토론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인기를 끌만한 시사풍자의 소재가 될 만한 게 적었던 게 아닐까. 대신 정치인을 흉내내거나 희화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다보니 정치 코미디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들어서는 나꼼수가 시사풍자의 맥을 이었다.  김어준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억압된 부분을 나꼼수가 건드리니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들의 폭발적 인기는 시사풍자가 시대적 상황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권들어 정치적 이슈에 대한 공론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정부의 입장과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탄압이 발생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 속에서 시사풍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꼼수의 인기와 함께 일베라는 곳이 눈에 띄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일베라는 공간은 나꼼수에 당황한 수구보수 지지자들이 나꼼수식의 활동을 한다고 하는 곳인데, 나꼼수와 일베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나꼼수가 시사풍자의 맥을 잇고 있다면, 일베는 내용없이 개인기에 의존하며 정치인을 희화화하던 정치 개그의 연장선에 서 있다. 나꼼수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궁금해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풍자적으로 풀었다. 가끔 지나친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국민들의 한풀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일베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하적 이미지나 표현을 사용하기만 할 뿐 실제 정치적 이슈에 대한 풍자는 볼 수 없었다.

일베의 탄생과 성장에는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들이 있지만, 참여정부 당시 형성된, 정치인을 개그의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분위기가 하나의 주요 요인이라 생각한다. 당시 정치인을 희화화하는 것은 재미있는 코미디였다. 일베 회원들이 재미있기 때문에 특정 정치인을 희화화한다는 반응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일베의 행위는 문제가 되는 걸까?

일베의 행위와 정치인을 희화한 개그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치개그는 대상에 대한 증오가 없는 단순한 코미디이지만, 일베의 행위는 대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가득 담긴 조롱이다. 정치개그는 소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지만, 일베는 권력에서 물러난 또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정치개그는 최소한 지켜야하는 윤리적 선을 지키지만, 일베는 그 또한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베는 정치개그를 따라하지만,  겉모습을 흉내내며 재미만 따라갈 뿐, 개그의 핵심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풍자와 조롱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자신들위 행위를 풍자라고 말한다. 진영논리에 따라 사이비 정치개그는 용인되고, 건전한 시사풍자와 정치개그는 제재받는 상황이 이제는 바뀔 수 있으면 좋겠다.

Posted in Korean society | Tagged , , | Leave a comment

실상과 실체

중국 불교를 공부 하다보면 실상(實相)을 바로 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반면 서양철학은 진리와 세상의 실체(實體) 파악하려고 한다.  실상과 실체는 모두 세상의 참모습을 의미하기에 두 철학 모두 세상을 알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상과 체의 차이는 이 두 철학의 기본 전제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를 말한다. 당연히 인식조건과 인식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체의 동양철학에서의 의미는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정도로 용과 대비되어 사용되었으나, 서양철학용어의 번역어로 쓰일 때는 존재 또는 존재의 토대를 말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토대이므로 불변을 전재해야 한다.

분석철학 이전의 서양철학은 불변의 토대를 파악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이 문제가 되었다. 계속 실수를 연발하는 인간의 경험으로 불변의 토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되었기에 여기서는 이성이라는, 불변의 토대와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능력이 중시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성은 인간의 불변의 토대로 인식되었다.그 환상이 깨어진 것은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었다. 불변의 토대=진리=절대선=인간의 이성의 도식을 가지고 있던 서구인들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의 전제가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그 사유의 틀을 해체하는 철학이 시작되었다. 분석철학은 불변의 토대 따위는 있는지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인간은 언어로 만든 집에 살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언어와 사유의 틀안에서의 명료성과 논리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 불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인식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이는 불교가 학술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었던 것이고, 초기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무관심했던 듯 보인다. 불교는 태생부터가 문제설정 자체가 달라서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하는 대신 현재 내 삶의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무기를 선언했다. 그 영역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현재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상황에 집중하였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의 이 고통의 근원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영원히 살아가리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되었으며,  나라는 허상을 기반으로 지어진 인식이 고통의 근원이고 그 허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이후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기에 이에 집착하며 어떻게 이에서 자유로와지는가라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나왔다.  부파불교는 나란 여러가지 요소들의 조합이라고 했고, 중관불교는 그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요소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는다하며 나란 임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공한 존재이라 했고, 유식불교는 나의 근원은 마음이라 했다. 여래장 불교는 중관과 유식을 조합하여, 근원은 마음이긴 한데, 임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그 본바탕인 공이 있고, 그게 여래의 마음이라는 주장을 한다.

여래장불교는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의 핵심적 사상이다. 중국불교에서 실상을 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개개인의 중생안에 있는 불성을 보는 것이라 이해해도 무방하다. 여래장 불교는 공(空)한 마음의 본모습을 여래의 마음이며, 인간의 참 자아라는 주장을 하기에 20세기 일본의 티벳불교 학자들로부터 실체적 토대를 설정하는 여래장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상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상으로 볼 때 불성은 절대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이는 바른 인식의 인연을 통해서 본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불교에서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을 이야기하며 인식의 전환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식이 바뀔 때 보는 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불성이 불변의 실체라 한다면,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볼 수가 없다. 실체를 볼 수 있는 이는 상은 불변한 체가 아니기 때문에 상을 본다고 한다.

물론 불교에서도 실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연기적 존재인 나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이를  실상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실체의 고정성보다는 실상의 변화성이 불교적 특수성에 맞는 이해기 때문이다.

Posted in Buddhism that I understand, Uncategorized | Tagged , , , | Leave a comment

[Book] 트라우마 한국사회

힐링이 붐을 일으키는 한국사회를 보다보면 다들 많이 아파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도 그 아픔이 무엇인지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는데, 김태형씨가 이를 분석했다.

세대별트라우마를 명명하고 트라우마와 관련해서 그들의 정치, 사회적 성향을 분석한 점이 흥미로왔다. 50년생 좌절세대의 좌절 트라우마, 60년 생 민주화 세대의 미완의 트라우마, 70년 생 세계화 세대의 혼란 트라우마, 80년 생 공포세대의 공포 트라우마의 분류가 나름 설득력 있었다. 생각해보니 50년 생은 어릴적부터 중년에 이르기 까지 참으로 고생을 많이했다. 그의 자녀 세대인 80년 생 또한 참으로 고생을 많이하고 있다. 처음으로 80년 생의 정치적 참여가 저조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60년생과 70년생은 지금은 힘들지만, 다른 두 세대에 비하면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물론 개개의 분류의 특성을 너무 일반화하여 말하고 있기에 개개인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70년 생이지만,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특성을 조금씩 공유하고 있다. 60년대의 감성을 낭만적으로 동경하며 대학생활을 했고, 남들처럼 어릴 적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대학원시절에 게임과 인터넷을 접하게 되면서 80년대의 디지털 감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는 각 시대들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겹쳐있다.

저자는 한국인 공통의 트라우마로 우월감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변방 트라우마를 지적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자를 무시하는 우월감 트라우마, 워낙 유명한 분단이후 기득권의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된 분단 트라우마, 영남과 서울의 차별적 개발이 불러온 변방 트라우마. 이부분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어떻게 트라우마가 형성되고 강화되었는지 한번 정리하기에 좋았다.

저자의 분석은 깔끔했으나, 대안은 역시나 미약했다. 사실 이건 개인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저자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저자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한국인의 공통 트라우마는 정치문제로  기득권 수구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는 정치로 풀어야 하기에 현재의 한국상황에서는 그냥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고 세대별, 또는 한국인 공통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해본다면 그나마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Posted in Reviews | Tagged , ,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