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과 실체

중국 불교를 공부 하다보면 실상(實相)을 바로 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반면 서양철학은 진리와 세상의 실체(實體) 파악하려고 한다.  실상과 실체는 모두 세상의 참모습을 의미하기에 두 철학 모두 세상을 알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상과 체의 차이는 이 두 철학의 기본 전제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를 말한다. 당연히 인식조건과 인식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체의 동양철학에서의 의미는 작용을 일으키는 주체정도로 용과 대비되어 사용되었으나, 서양철학용어의 번역어로 쓰일 때는 존재 또는 존재의 토대를 말한다.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토대이므로 불변을 전재해야 한다.

분석철학 이전의 서양철학은 불변의 토대를 파악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이 문제가 되었다. 계속 실수를 연발하는 인간의 경험으로 불변의 토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되었기에 여기서는 이성이라는, 불변의 토대와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능력이 중시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성은 인간의 불변의 토대로 인식되었다.그 환상이 깨어진 것은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이었다. 불변의 토대=진리=절대선=인간의 이성의 도식을 가지고 있던 서구인들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의 전제가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그 사유의 틀을 해체하는 철학이 시작되었다. 분석철학은 불변의 토대 따위는 있는지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인간은 언어로 만든 집에 살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언어와 사유의 틀안에서의 명료성과 논리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떨까? 불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인식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이는 불교가 학술적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논의되었던 것이고, 초기불교에서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무관심했던 듯 보인다. 불교는 태생부터가 문제설정 자체가 달라서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하는 대신 현재 내 삶의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했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무기를 선언했다. 그 영역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현재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상황에 집중하였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의 이 고통의 근원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영원히 살아가리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시작되었으며,  나라는 허상을 기반으로 지어진 인식이 고통의 근원이고 그 허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이후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기에 이에 집착하며 어떻게 이에서 자유로와지는가라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이상학적 논의가 나왔다.  부파불교는 나란 여러가지 요소들의 조합이라고 했고, 중관불교는 그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요소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는다하며 나란 임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공한 존재이라 했고, 유식불교는 나의 근원은 마음이라 했다. 여래장 불교는 중관과 유식을 조합하여, 근원은 마음이긴 한데, 임시적으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그 본바탕인 공이 있고, 그게 여래의 마음이라는 주장을 한다.

여래장불교는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의 핵심적 사상이다. 중국불교에서 실상을 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개개인의 중생안에 있는 불성을 보는 것이라 이해해도 무방하다. 여래장 불교는 공(空)한 마음의 본모습을 여래의 마음이며, 인간의 참 자아라는 주장을 하기에 20세기 일본의 티벳불교 학자들로부터 실체적 토대를 설정하는 여래장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실상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상으로 볼 때 불성은 절대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이는 바른 인식의 인연을 통해서 본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불교에서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을 이야기하며 인식의 전환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식이 바뀔 때 보는 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불성이 불변의 실체라 한다면,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 볼 수가 없다. 실체를 볼 수 있는 이는 상은 불변한 체가 아니기 때문에 상을 본다고 한다.

물론 불교에서도 실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연기적 존재인 나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이를  실상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 실체의 고정성보다는 실상의 변화성이 불교적 특수성에 맞는 이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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