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뜰앞의 잣나무

하루는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 물었다. “조사가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답했다. “뜰앞의 잣나무.”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州云, 庭前栢樹子.)

동문서답같은 이 선문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설명이 있으나, 내게는 참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강의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선문답의 대표적 예로 보여주곤 했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이 화두가 이해가 되었다. 이해되고 나니 이처럼 멋진 대답이 없었다.

뜰앞의 잣나무. 어떤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인연에 의해 그냥 거기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사가 서쪽으로부터 온 것도 수많은 인연에 의해 그냥 발생했던 것이다.

수많은 인연에 의해 발생했던 일이기에 어느 하나를 꼭 찍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유를 따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의 분별작용에 의한 것이지 대상이나 사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이나 사태의 실상은 그냥 인연따라 존재했다가, 인연따라 사라지며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분별작용이 이를 못 흘러가게 우리 의식속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온 이유는 뜰앞의 잣나무와 다를 바 없다.  조주의 답변은 매우 간단하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가르침들이 녹아있다.

1. 여느 선문답들처럼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조주의 대답은 질문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만약 조주가 “뜰앞의 잣나무”라 대답하지 않고, 설명을 해주었다면, 질문자는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깨달음은 스스로 고민해서 얻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앞서 말했듯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분별작용이다. 조주의 대답은 질문자가 여전히 분별작용에 얽매여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어지는 대화의 뒷부분에 보면,질문자는 자신이 그렇게 얽매여 있는 게 아님을 항변한다.  “스님, 저는 특정한 대상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和尙莫以境示人).” 그러자 조주스님은 “나도 특정한 대상을 일러준 것이 아니네(吾不以境示人).”라고 하였다.  조주스님이 이렇게 답변한 것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 단지 분별작용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뒤에 이어진 문답에서 질문자는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조사가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조주선사는  다시 답했다. “뜰앞의 잣나무.”  이미 그 대답 안에 모든 가르침이 녹아있었기 때문에 같은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

3. 뜰 앞의 잣나무라는 대답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연기법을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나무는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있었기에 거기에 있는거다. 나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씨앗이 있어야하고, 씨앗이 큰 나무가 될 수 있게 할 수 있는 주변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햇볓, 물, 심지어 그 자리를 돌이나 다른 나무가 막고 있지 않아야 하는 거다. 그러한 원인과 조건이 있었기에 뜰앞의 잣나무는 있었던 거다. 그 수많은 인연의 거미줄을 보면, 나무를 단지 하나의 나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인연의 거미줄이 하나둘 사라질 때 나무도 서서히 사라질 준비를 하게 된다. 그게 세상의 참모습, 실상이다. 그건 잣나무만 그런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다.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온 것도 그냥 발생한 듯 하면서도 수 많은 인연의 거미줄이 이를 지탱하고 있는 거다.

4. 뜰 앞의 잣나무라는 표현으로 경이로운 실상을 보게하면서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온 이유를 언어의 한계를 넘어 종합적으로, 직접적이며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돕고 있다. 만약 조주선사가 한 두가지 이유를 대고 설명하고 말았다면, 달마의 서쪽으로 온 이유는 그 언어 표현 속에 갇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뜰 앞의 잣나무의 비유를 통해 그 이유는 매우 풍성해진다. 조주선사는 불교에서 언제나 강조하는 언어의 틀을 벗어난 실상보기를 대화 속에서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 선문답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선문답은 언어의 제약과 분별심을 떠나서 실상을 그대로 보게 해주는 선문답이라고 생각한다.

뜰 앞의 잣나무를 바라볼 때 왜 거기있느냐를 따지지 않지지 않고 그냥 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수많은 인연들이 얼기설기 얽혀 현재 그 자리에 있는 나무의 모습을 진짜 그대로 볼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나무의 실상을 보게된다면, 그  순간 그 신비로움에 경탄하게 되는 것처럼  된다. 잣나무는 잣나무이지만, 그 경탄하는 마음.. 그게 조주가 가르치고 싶었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뱀발1 : 조주선사는 선사들 중에서 가장 재치가 넘치는 선사로 유명하다. 그는 ‘개에게사람들은 도 불성이 있는가” 같이 매우 유명한 선문답을 남긴 사람이다.

뱀발2 :  나는 이 선문답을 지도 교수님 수업에서 처음 들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건 뜬 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당시 조주선사가 머물던 곳에 잣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잣나무가 아니라 다른 나무가 있었다면 다른 나무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설명은 내가 선문답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선문답은 뜬구름잡는 소리라는 생각-을 깨고, 단지 당시 맥락이 생략되어 제 3자가 이해하기 어려울 뿐인 대화라는 관점을 갖게 해주었다. 그 이후에 이 선문답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는지, 있다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이 나지않는데, 당시 공부했던 책들을 한국에 두고온 관계로 확인해 볼 수 없다. 이게 조금은 아쉽다.

뱀발3: 찾아보니 백수가 중국어로는 잣나무가 아니라 측백나무라 한다. 실제로 조주가 머물렀다던 절에는 측백나무가 있다.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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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선문답] 뜰앞의 잣나무

  1. michael says: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는 항상 선형적인 문답방식을 취합니다. 제가 애청하는 미드 [셜록홈즈]나 [닥터하우스]에 보면 이러한 문답은 질문자가 ‘정확한’ 답을 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주변을 파헤치게 만들죠.
    이런 ‘탐정식 사유’는 존재를 현상으로, 현상을 다시 법칙으로 환원해서 그 안의 논리적 동일성을 확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한 확증이 불가능할 때는 폭력성이 나타나기도 하구요. (재미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은 그런 폭력성에 짜증을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조주선사의 선문답을 ‘연기설’의 관점에서 설명하신 것은 제 입장에서는 탁월한 관점이라고 봅니다.

    좀더 사족을 덧붙인다면, 연기설을 제 나름대로 해석했을 때 현대 물리학의 혼돈이론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물론 혼돈이론은 과학이론이라는 점에서 ‘선형적 해석’을 포기하지 않지만, 적어도 전통적인 인과적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죠. 그 대안인 ‘통계적 추측’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흄의 회의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전통적 인과론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혼돈이론과 ‘연기설’의 연관점은,
    일부 진화생물학자들이 계(system)에서 혼돈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창발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론의 전제에 따른 정확한 개념을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계의 기본적인 agent들이 ‘자유도’를
    가지고 있고, 이 ‘자유도’에 의해 주변의 agent들과 불특정하고 불확정적인 ‘관계맺음’을 함으로써 계 전체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다는 게 창발성 개념의 요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혼돈이론에 따르면 ‘혼돈’은 사실은 질서와 동일한 개념이지만, 어떤 불변하는 특정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질서가 아니라, 계 자체의 내재적 동력에 의해 형성-확장-쇠퇴-사멸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질서를 뜻합니다.
    계의 내재적 동력에 따른 질서이므로 계의 외부에서 관찰했을 때는 혼돈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엄격한
    생성과 소멸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거죠.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달마=잣나무=계 이고, 이 시스템들은 한편으로는 이들을 포괄하는 더 큰 시스템과
    상호작용하면서 내재적 운동을 한 결과로 나타난 ‘창발적 존재’, 즉 연기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달마는 왜 서쪽으로 갔나?’, ‘뜰 앞의 잣나무는 왜 저기 있는가?’라는 질문은 성립할 수가 없는거죠.
    그런 질문들은 계의 내재적 운동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참여하는 순간 해소될 수밖에 없는 가짜 질문이고,
    창발하는 존재들을 피상적인 관념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아를 강화하려는 전략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더 큰 관심은 연기의 시스템에 참여하는 자, 연기의 시스템 그 자체인 자, 그것에 의해 생성된
    자아를 경험하고 있는 주시자에 있습니다. 이걸 불교이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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