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이옥순,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

내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느낀 건 두 번이었다.

첫번째.  티벳에 매료되어 티벳불교를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을 보았을 때.

두번째. 인도네시아 음악에 매료되어 인도네시아 음악을 가르치고 배우는 연로한 미국 분들을 보았을 때.

부부가 나란히 앉는 것도 금지하는 관습을 가진 전근대적인 티벳에 매료된 많은 미국 학생들의 모습이나,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후진국일 뿐인 인도네시아 음악에 빠져 그 무거운 악기를 멀리서 공수해오고,  평생을 그 음악을 가르치는데 바치신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낯설기만 했다. 내 전공의 특수성에 때문에 유독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긴 하지만, 한국은 근대화, 서구화를 위해 달려왔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동양 국가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평생을 바치거나 바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게 충격이었다.

전공 덕분에 티벳의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을 알고 있었기에  티벳의 경우 잠시의 충격으로 끝났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이해하는데 오래걸렸다.  작년에 워싱턴에서 인도네시아 음악 축제에 갔을 때, 난생 처음 그들의 화려한 문화를 목격했다. 이런, 인도네시아도 자신들의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었다. 그 때야 비로소 나는 인도네시아를 나와 다른 미개한 타자로 보는, 그들을 내려보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이옥순의 <내안의 오리엔탈리즘>은 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다시 돌아보게해주는 책이었다. 그녀의 책은 읽기가 편했다. 학술서라기 보다는 에세이 같은 느낌의 글이지만, 그 담고있는 내용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이 책은 소설 속에 드러난 작가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분석하는 방식을 취해서  오리엔탈리즘이 실재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오리엔탈리즘을 박제 오리엔탈리즘과 복제 오리엔탈리즘으로 나눈다.박제 오리엔탈리즘은 영국인들이 인도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든 인도의 이미지이다.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한국인들이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영국인들은 인도를 타자화 하고,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로 규정하고 이를 소설들을 통해 퍼트렸다. 게으르고 더럽고, 문명이란 찾아볼 수 없는 미개인들의 이미지로 인도를 박제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들은 그것의 충실한 확성기 역할을 했다. 셜록홈즈 속에 나온 범죄자들의 많은 경우 인도인이었으며,  소공녀나 다른 소설에서 인도는 미지의 위험한 죽음의 장소로 표현되어 있었다.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를 성장이 덜된  인도인에게 가르친다는 그들의 오만함은 의외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영국여성들은 인도에서 바느질은 남성 카스트가 하는 사실을 무시하고, 인도 여성들에게 영국 여성처럼 바느질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사실 바느질을 여성의 일로 했던 것이 남녀차별주의의 양상인데, 그들은 인도 여성의 해방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여성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었다.

P.39. “그들은 노예근성, 참을성, 나약함, 끈기, 순종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단점도 있다. 교활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과 위증의 오명을 개의치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걸 잘못이라 하지 않는다.”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성향 규정과 비슷해서 솔직히 놀라왔다.

p.92. 역사학자 베일리의 글을 인용한 이 문장. 전통적인 인도는 완고한 사회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영국이었다. 지역에 산재하는 실용적인 여러 관습을 통일된 브라만 중심의 ‘힌두법’으로 법전화하고, 법정과 인종 조사를 통해서 사람들을 서로 불통하는 카스트로 만들었다. 식민주의자는 인도 사회를 완고하고 무능하다고 이해하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한국에 온 미국 여선교사들들의 한국 여성의 삶과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미국내의 성차별의 불만을 투영한 것을 생각나게 했다.

p.99-100.  그러나 식민정부가 희생자로 여긴 여성은 인도의 상층여성 일부에 한정될 뿐 다수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인 남성이 갈색여성을 구하는’ 정의의 기사로 나서서 추진한 일련의 사회입법의 수혜자는 극소수의 브라만 여성이었다. …. 홀어미의 재가를 허용한 입법도 대다수 인도 여성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재혼한 여성은 드물었고, 남성들의 주장대로 재혼하는 여성은 남편의 유산과 자녀를 포기하도록 규정함으로써 그때까지 자유롭게 재혼하던 하층 여성들에게서 오히려 재산권과 자녀양육권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외부의 힘에 의한 여성해방이란 게 진정한 의미의 여성해방을 이루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 인도를 바라보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영국인의 시선 그대로 인도를 미개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동양을 타자화함으로서 미개의 시선에서 자신을 제거한다.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두번째는 미국의 히피들처럼 신비주의적 이미지로 인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 인도로 떠난다. 성자와 깨달음의 나라. 류시화의 소매치기마저 깨달은 이로 보는 서술에서는 할말을 잃었다. 재미난 점은

두 방식 모두 히말라야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무한 애정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p.120. 이들이 히말랴야를 종아하는 이유는 산이 많은 우리 땅과 비슷해서 향수를 느끼기 때문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익숙함은 장엄한 자연보다는 종교(불교)에 대한 익숙함이고, 그보다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이며, 속이고 부대끼는 인도의 저잣거리에서의 즉각적 도피이다. 사이드가 말한 대로 익숙한 것은 ‘우리(이쪽)’가 된다. 영국이 복잡다단한 힌두교보다 이해가 가능한 이슬람을 ‘우리’로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별은….>의 문희도 히말랴야 속의 불교국가 티베트를 완전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티베트인들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소박함과 인간성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군요. 종교와 사람이 분리되지 않고 일치돼 있어요.” 이 히말라야에는 강석경을 위해 라사의 포탈라 궁전이, 송기원을 위해서는 이상향인 샹그릴라가 숨어있다. 두 사람에게 가지 못하는, 갈수 없는 그곳은 환상의 공간이다.

p. 131.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에서 브레드 피트는 아들에게 말한다. “시간이 정지된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인단다.” 티베트처럼 인도도 늘 시간이 정지하고 역사가 부재한 곳,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없는 반근대, 반문명의 이미지로 채색된다. 이는 서양이 동양을 보는 정형화된 인식이다. 서로 견해가 다른 류시화와 강석경도 이 점에선 시선을 공유한다. 이들의 차이는 류시화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실린 사막지대의 아름다운 컬러 사진들처럼 불모의 사막으로 대표되는 덜 발전한 세상을 통해 고대 문명의 미라 같은 인도를 보여주는데 비해, 강석경은 ‘영광스런 인도의 과거는 흘러갔다!’고 외치며 ‘현재’를 정당화하고 인도의 ‘과거’를 억압한 제국주의자의 시선으로 인도에는 ‘오늘이 없다’고 무시간의 인도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이다. 

p.143. 인도를 성자의 나라로 그려낸 류시화의 가장 큰 덕목이자 죄목은 인도를 시간 속에 박제했다는 점이다. 류시화는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꿈꾸지 않는 ‘수동적’ 인도인을 소영웅으로 그려냈지만, 그들을 영웅이나 성자로 만드는 진정한 영웅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p.164. 역설적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 인도가 여행자들을 완성한다.

그러나 법정스님의 글도 오리엔탈리즘적 사고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p.137 인도의 소음에 괴로워하고, 우연히 들은 서양음악을 듣고 편안해하는)을 지적한 저자의 꼼꼼함에서는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단순히 낯섬과 불편함에 의해 나오는 반응일 뿐인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거대담론으로 이를 논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체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속에, 그리고 내 속에 있던, 우리 속에 있던 오리엔탈리즘을 구체적으로 점검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 한국 개화기와 일제시대와 오버랩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휘저었다. 타인을 타자화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사고작용이 아닌가? 여하튼 근대화와 산업화를 통해 얻게 된 편리함이 좋은 건 아닐까? 이미 근대화가 준 그 편리함에 푹 젖어진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개발이 덜 된 국가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제거하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나 떠나지 않는 질문… 여성인권의 향상이라는 명분 하에 벌어지는 서구식 근대화가 과연 옳은 걸까? 그러면서 한편 그래도 여성인권이 좀 더 보장되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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