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럽 배낭여행인가?

배낭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은 많다. 중국을 갈수도 있고, 일본을 갈 수도 있고, 인도를 갈 수도 있고, 호주도 갈 수 있다. 그 많은 곳 중에서 난 첫 배낭여행지로 유럽을 택했다. 이유는 그냥. 이었다. 그냥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가려고 맘 먹는 순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왜 유럽을 가는 거지?

고민이 시작된 것은 계획 세우기의 막막함때문이었다. 유럽을 그토록 가고 싶어했으나 너무나 넓다보니,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기간을 얼마나 해야할지, 내가 보고 싶은 게 무엇인지 순간 망막했다. 그냥 유럽 배낭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 그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 알았다. 그러나 그냥 가고싶은 마음이 강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막연하게 시작된 여행계획이었다.

당시 나는 5년간의 미국 생활을 후, 영국 동생집으로 건너가 있었다. 원래 계획은 영국에서 6월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3월에 건강문제로 한국에 나오기로 한 상황이었다. 건강문제로 여행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인데도, 한국에서의 두달 간의 요양이후에 5월에 영국에 다시 들어가 유럽여행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나왔다. 그렇게 구체적 계획없이 5월 19일부터 6월19일까지 한달간의 유럽여행 기간을 미리 정해두고 3월에 영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 검사해본 결과, 모든 게 신경성일 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가고픈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내가 가고싶은 곳들을 일단 정해보기로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이태리와 그리스였다. 그 이유는 몰랐으나 내가 이유를 부여했다. 서양문화의 근간이 되는 나라들,  그리이스 로마 문명의 발상지를 보고 서양을 이해하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를 만들었다. 아울러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도시들을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이태리와 그리스 간의 연결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를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여행의 주제는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들이었고, 그렇게 로마, 이태리 북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이르는 일정을 짰다.

대강의 여행 경로를 다 정해놓고도,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당시 나의 상황은 여행가기에 적절한 지 고민되었다. 지난 5년간의 도전이 실패하고 약간의 저축만 남은상황에서 과연 가야할까? 당장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게 맞지 않을 꺼라는 이성적 판단이 있었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실패이후 찾아온 우울증에 의욕상실과 죽음의 욕망을 느끼던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 유럽여행 정보를 미친듯이 찾아보던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5년간의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동안 열심히 달린 나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자신감의 회복과 나 자신을 찾기 위해, 가능하면 모든 만나는 것에 나를 오픈하고 유럽을 담아오자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위해, 40대 중반의 나홀로 유럽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왜 그게 유럽이어야했는지, 내가 왜 그리 유럽여행을 하고 싶었는지는 여행 중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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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의 굿판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언제 국회 본회의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보겠습니까?”

아크로 게시판에 남겨진 이 댓글만큼 현재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의 열기를 잘 설명하는 표현이 있을까? 필버에 대한 열기는 2002년 월드컵,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생각나게 한다. 필리버스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흥분은 그동안 야당지지자들과 국민들이 얼마나 이런 공간을 목말라했는지 반증하고 있다.

한국민중들은 오래전 부터 지배세력에 대한 불만을 마당극의 해학과 굿판의 흥겨움으로 풀어왔다. 필리버스터를 보면 그동안 이명박근헤 정권을 통해 쌓아왔던 불만들을 쏟아내는 굿판 같다. 굿판의 무가를 들으며 사람들이 그동안의 힘겨움을 해소하고 하나되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울고 하나라는 동질감을 얻으며 결속을 다진다.

필리버스터는 쇼다. 처음 필리버스터를 한다고 했을 때, 더민주는 심각한 악법인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기위한 최후의 카드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그런데 뒤늦게 드러나는 사실에 의하면, 더 민주는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에는 적극 동의하고 있었다. 더 민주에서 필리버스터를 하는 목적은 수정안 논의의 시간을 벌기위한 것이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끝장 토론으로도 될 텐데, 왜 극적인 필리버스터가 필요했을까? 한달 전에 이미 예고되었던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가 야당 자신들을 위한 쇼였는지, 국민을 위한 쇼였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국민들이 즐기고 있으니 국민들을 위한 멋진 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댓글과 사람들이 열광적 반응이 보여주고 있듯이 필리버스터는 지난 정권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SNS와 야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일괄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칭송하고 있다. 연설을 한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표현은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야당 신진 정치인들의 얼굴알리기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법안의 통과결과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한국의 정치 역사를 새롭게 쓰게될 것이다.

불행히도 필리버스터 굿판은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동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여론의 팽팽한 대립은 완충지대 없는 한국정치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새누리당이 북한 미사일과 사드배치논의로 지지자들을 결집했던 것처럼, 더 민주는 필리버스터로 지지자를 결속시키고 있다. 마치  종교지도자가 부흥회를 통해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시는 것같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도 이러한 한국 정치의 종교화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지도자 중심주의가 한국정치의 종교화를 이끌고 있으므로 인물 중심이 아닌 이슈 중심으로 논의를 해보자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만들어낸 상황을 보면, 문제는 단순히 인물이 이슈로 옮겨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의 해결은 정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정치를 재화를 배분하기 위한 타협과 상생의 기술로 보느냐 아니면 (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승리의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갈등을 푸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와 이에 대한 열광은 현재 한국 정치가 어디에 서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중간지대는 사라지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타협과 상생은 사라지고 전쟁과 죽음을 각오한 결기만 남은 정치. 과연 필리버스터의 굿판은 앞으로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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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판타지 소설의 영감의 원천

영국에는 환타지 계열의 유명 작가들이 많다. 의 J.R.R. 톨킨, 의 C.S.루이스, 의 루이스 캐롤, 그리고 유명한 의 J.K.롤링. 그들의 소설을 읽었을 때 어떻게 이러한 상상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영국의 풍광을 보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환타지 세계는 기존에 익숙한 것들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었었다.

영국은 구릉이 참 많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바람이 쎄다. 영국의 바람부는 언덕과 때로는 조금 음울한 날씨는 이라는 소설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을 설정해 주었고, 사람들에게 구릉 안에 사는 생명체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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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아래서 책을 읽는 장면이었는데, 영국에 가 보니 나무그늘만큼 책 읽기 좋은 곳이 없어보였다. 한여름 햇볕은 너무 따갑지만, 그늘은 선선한 영국의 기후 상 나무그늘을 휴식을 위한 좋은 곳이고, 나무의 생김새 또한 낮으면서도 약간 아래쪽이 퍼진 형태라서 그늘도 넓게 만들어주면서 아늑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도 잘 보면 책읽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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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다니면서 앨리스에서 느꼈던 이국적 풍광이 사실은 나에게만 이국적이었지 영국인들에게는 일상적이며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래 고양이는 동생네 집근처 펜스 위에서 본 것인데, 앨리스에서 느꼈던 체셔고양이 그 자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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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의 여왕의 나라에서 보는 퍼즐식 정원이라든가, 양옆의 거대한 정원수의 뒤에 보이는 궁전은 영국 왕궁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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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곳곳에 작가들이 문학적 영감을 받은 곳이 존재하지만, 환타지 소설과 관련해서는 옥스포드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 시스템은 옥스포드의 칼리지 시스템을 조금 변형시킨 것으로, 옥스포드에서 칼리지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함께하며 대학생활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녁 정찬 시간이었는데, 칼리지의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공식 대학 가운을 입고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한다. 다행히 현재는 의무는 아니라고 한다. 단지 옥스포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스템 뿐만 아니라, 몇몇 장소 또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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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여행하면서 상상력의 뿌리는 결국 일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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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논리를 당연시 바라보는 나를 보다.

몇달 전 친구었한명이 미국내의 시간강사 처우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링크했었다. 정규직의 절반보다 적은 금액과 불안정한 상황. 그 상황 자체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경쟁할 기회라도 주어지니 그게 어디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가을은 한창 여기저기 직업의 원서를 낼 시간이다. 이번에 아시아 종교와 불교 통틀어서 조교수 자리가 13군데 나왔다. 2015년도는 유난히 일명 한국인들에게는 듣보잡인 대학들보다는 유명한 대학들이 많아 기존에 작은 대학에서 일은하는 사람들도 원서를 낼 것이기 때문에  경쟁이 더욱 심하겠지만,  그래도 13군데가 어딘가. 한국에서 온 나에게 이들의 상황은 천국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이쪽 분야 4년제 대학 조교수 자리는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52개 주로 구성된 나라라는 것과 한국의 크기는 미국의 주 하나정도거나 그보다 작다는 상황을 고려해보면, 한국에서 4년마다 1군데가 열리는 것이라 답답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서는 13군데가 어딘데,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게 어딘데.

시간강사 월급도 한국에 비하면 좀 많긴 한데, 더 큰 문제는 한국은 그나마 나라가 작아서 여러군데 시간강사를 뛸 기회라도 있지만, 미국은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보스턴을 제외하고는 도시마다 학교 수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학기 버지니아대에서 한학기 시간강사를 해봤다. 정말 딱 4개월 최저 생활비였다. 그나마 버지니아대는 이 근처 대학에 비해 많이 주는 것인데, 나 혼자였기 때문이지 딸린 식구가 있다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당연한 나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경쟁 기회라도 주어지는 것에 기뻐하면서, 나는 그렇게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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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공짜는 없다.

오늘 우연히 마크라는 사람의 글을 봤다. 과정의 고통을 수용할 용기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결과에 대한 상만 동경하고 과정의 고통을 견디려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지만, 그의 독특한 직설적 화법이 충격을 주었다. 난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었던 게 아닐까. 그게 현재 내가 지지부진한 이유다.  아래는 나의 뒤통수를 정신 번쩍 나게 때렸던 마크의 글의 링크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nny_j_lee&logNo=220598065665&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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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화쟁사상과 통불교론이 불편한 이유

한국사람 치고 원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원효가 묘지에서 썩은 물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이해는 잘 안가도 교과서에서 대립과 갈등을 해결하는 화쟁사상을 주창했다는 것을 배웠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특히 한국불교에서 원효는 공부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원효는 한국적 불교인 통불교를 성립시킨 한국불교의 종조로 추앙받기도 했다. 원효 사상의 심오함에는 동의하지만, 원효와 화쟁사상과 통불교론을 볼 때마다 무언가 불편하다.

오랫동안 불교학계에서는 원효를 화쟁사상의 틀에서 해석해왔다. 물론 원효가 화쟁적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그걸 그의 독특한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두 대립 사상, 또는 다양한 의견의 통합 노력은 동서 사상사에서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가까이는 불교내의 지의도 그랬고, 종밀도 그랬고, 멀리는 칸트마저도 두 가지 방법론의 종합화를 추구하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독자적 사상이라 칭송할 수 있는 것일까?

원효의 화쟁 사상이 다른 통합적 사유와 차별이 되려면, 화쟁 사상 자체의 차별적 논리가 있어야 한다. 박종홍은 이를 개합의 논리, 입파와 여탈의 논리라하며 특수성을 부여했지만, 솔직히 난 그걸 독자적 통합의 논리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학자들이 일심에서의 통합이라는 주장은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그 독창성에는 의문이다. 이에 기반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통불교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어불성설이다. 세상에 어느 불교가 통불교가 아닌 게 있으며, 어느 종교가 통종교가 아닌게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 조차도 초기에는 기존 토착종교의 이야기나 사상을 흡수하면서 새로운 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통불교론의 허구성과 그 저변에 깔린 민족주의가 비판되어왔다. 폭넓게 공부하다보면,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글로벌주의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는 로버트 버스웰이 제시하는 범아시아론의 맥락에서 한국불교를 재조명하는 것이 더 나은 대안일 수 있다.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내놓아야 한다는 한국불교계의 간절함은 이해하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한국불교를 더 우습게 만드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여전히 강세인 원효의 화쟁사상과 통불교, 나아가 화쟁사상을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키로 여기는 상황이 내게는 참으로 불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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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배치와 한반도 평화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냉전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이른바 신냉전시대가 오고 있다.

사드배치가 한국가 중국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 분명함에도, 한국정부는 이를 강행하려는 분위기다. 현 한국정부의 요근래의 외교정책을 보면 한국인으로서 한숨만 나온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정부의 행동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선거를 위해 보수층 집결을 위한 것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이 말에 일정부분 동의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있었던 정신대 관련 일본과의 합의문도 그렇고, 북한 위성/미사일 발사 직후 미국의 반응도 그렇고, 개성공단의 운영정지 뒤 미국과 일본의 환영선언을 봐도 그렇고, 이건 미국의 대중국견제의 욕망에 남한정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의문이 들게 한다.

미국은 언제나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가 미국은 우방이며 자유민주주의 지원하는 국가이므로 우리를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다. 한국문화에는 의리와 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는 분위기가 존재하는데, 그건 순진함을 넘어선 무식의 소치이다. 미국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국제 사회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전쟁이 나면 당연히 미국이 도와주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방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동북아 패권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를 이야기한다해도 그건 수사학일 뿐이다. (그 가치를 믿으며 지키려는 성실한 개개의 미국인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시작부터 그 땅에 사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건설된 국가이며, 흑인의 인권을 인정한지 수십년밖에 안된 국가다. 체재의 안정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지원한 독재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미국은 한국의 군사쿠테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가. 쿠테타정부라 할지라도 한국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미국의 구미에 맞추는 적합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명분은 북한의 공격에 대한 남한과 미국군의 보호이라고 하지만, 이번 사드 설치에는 미국의 중국감시 의도가 숨겨져 있다할 수 있다. 이미 몇몇 학자들이 말했듯이 사드는 북한의 남한 공격을 방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드의 설치를 원하는 것은 사드를 통해 중국과 북한이 움직임을 감지하고 미국 본토 공격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국가 수립 후 외국의 공격을 받은 것은 태평양 건너 일본이었다.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만약 중국이 태평양을 건너 공격하려 한다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것 같다. 덧붙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냉전인식틀에 기반한다. 중국이 비록 자본주의적 요소를 많이 도입했다 하더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팽창은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수용되는 것 같다.

왜 한국 정부는 이런 미국의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일까?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기에 정권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받지 못할 경우, 미국의 암묵적 승인에 의해 정권을 유지해온 역삭가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와 달리 현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절반의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이다. 당선 이후 선거부정 논의가 끊이지 않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되지마자 전면적으로 선거공약을 뒤집고, 이어 일어난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는 무능력과 무책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적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일방적인 4차원적 소통법(사실은 불통)은 국민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지율이 30-40%를 오간다는 것은 이 정부이 정당성이 얼마나 위기 상황인지 알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미국에서 정부에서 암묵적 승인을 거두는 결정을 한다면, 그 파장은 클 것이니 당연히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따를 수 밖에 없다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의 위기의 고조는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니, 현 정권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일단은 좀 더 주체적인 정부를 만든는 게 중요할 것이다.  총선과 대선에서 바른 대표자를 뽑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미국의 동북아 패권 욕망을 내려놓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에게 미국이 그동안 한국에 강요해왔던 불합리한 처사들, 예를 들어 이승만 정권 수립을 도와준 것, 친일파 청산 기회를 없애버린 것, 냉전이데올로기로 백만의 양민 학살에 가담하거나 묵인한 것,  독재 정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 정신대 합의를 하게 했던 것 등등을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사실을 제대로 알림으로써 동북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생각한다. 미국이 한국 상황에서 손을 뗄 때,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는 가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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