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자와 정치 개그

오늘 피터님의 정치풍자 코미디에 관한 글을 읽다가 한국 정치개그의 변화가 일베의 탄생에 기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http://impeter.tistory.com/2829)

정치풍자코미디의 전성시대는 참여정부 시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이 즐거워 한다면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코미디에 대한 제재는 없었다. 근데 그 당시 김형곤은 시사풍자는 사라지고 스토리도 없고 감각적 개인기에 의존한 코미디만 존재한다며 당시 상황을 한탄했다고 한다. 이게 좀 모순된 진술이긴 한데, 김형곤의 지적이 보여주는 것은 당시 시사풍자를 할 만한 시사적 이슈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시사풍자는 억압이 있을 때  권력자의 탄압이 두려워 에둘러 표현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탄압이 없으면 그 공감대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참여정부 시대에는 정치적 이슈를 대화로 풀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 이야기하고 공론화하여 토론하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인기를 끌만한 시사풍자의 소재가 될 만한 게 적었던 게 아닐까. 대신 정치인을 흉내내거나 희화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다보니 정치 코미디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생각한다.

이명박 정권들어서는 나꼼수가 시사풍자의 맥을 이었다.  김어준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억압된 부분을 나꼼수가 건드리니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이다. 그들의 폭발적 인기는 시사풍자가 시대적 상황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권들어 정치적 이슈에 대한 공론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정부의 입장과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은밀한(?) 탄압이 발생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 속에서 시사풍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꼼수의 인기와 함께 일베라는 곳이 눈에 띄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일베라는 공간은 나꼼수에 당황한 수구보수 지지자들이 나꼼수식의 활동을 한다고 하는 곳인데, 나꼼수와 일베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나꼼수가 시사풍자의 맥을 잇고 있다면, 일베는 내용없이 개인기에 의존하며 정치인을 희화화하던 정치 개그의 연장선에 서 있다. 나꼼수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궁금해하거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풍자적으로 풀었다. 가끔 지나친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국민들의 한풀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일베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하적 이미지나 표현을 사용하기만 할 뿐 실제 정치적 이슈에 대한 풍자는 볼 수 없었다.

일베의 탄생과 성장에는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들이 있지만, 참여정부 당시 형성된, 정치인을 개그의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분위기가 하나의 주요 요인이라 생각한다. 당시 정치인을 희화화하는 것은 재미있는 코미디였다. 일베 회원들이 재미있기 때문에 특정 정치인을 희화화한다는 반응은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일베의 행위는 문제가 되는 걸까?

일베의 행위와 정치인을 희화한 개그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치개그는 대상에 대한 증오가 없는 단순한 코미디이지만, 일베의 행위는 대상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가득 담긴 조롱이다. 정치개그는 소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지만, 일베는 권력에서 물러난 또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정치개그는 최소한 지켜야하는 윤리적 선을 지키지만, 일베는 그 또한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베는 정치개그를 따라하지만,  겉모습을 흉내내며 재미만 따라갈 뿐, 개그의 핵심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풍자와 조롱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자신들위 행위를 풍자라고 말한다. 진영논리에 따라 사이비 정치개그는 용인되고, 건전한 시사풍자와 정치개그는 제재받는 상황이 이제는 바뀔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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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트라우마 한국사회

힐링이 붐을 일으키는 한국사회를 보다보면 다들 많이 아파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도 그 아픔이 무엇인지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있었는데, 김태형씨가 이를 분석했다.

세대별트라우마를 명명하고 트라우마와 관련해서 그들의 정치, 사회적 성향을 분석한 점이 흥미로왔다. 50년생 좌절세대의 좌절 트라우마, 60년 생 민주화 세대의 미완의 트라우마, 70년 생 세계화 세대의 혼란 트라우마, 80년 생 공포세대의 공포 트라우마의 분류가 나름 설득력 있었다. 생각해보니 50년 생은 어릴적부터 중년에 이르기 까지 참으로 고생을 많이했다. 그의 자녀 세대인 80년 생 또한 참으로 고생을 많이하고 있다. 처음으로 80년 생의 정치적 참여가 저조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60년생과 70년생은 지금은 힘들지만, 다른 두 세대에 비하면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물론 개개의 분류의 특성을 너무 일반화하여 말하고 있기에 개개인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70년 생이지만, 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특성을 조금씩 공유하고 있다. 60년대의 감성을 낭만적으로 동경하며 대학생활을 했고, 남들처럼 어릴 적 미국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대학원시절에 게임과 인터넷을 접하게 되면서 80년대의 디지털 감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는 각 시대들의 트라우마가 조금씩 겹쳐있다.

저자는 한국인 공통의 트라우마로 우월감 트라우마, 분단 트라우마, 변방 트라우마를 지적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자를 무시하는 우월감 트라우마, 워낙 유명한 분단이후 기득권의 정권 유지를 위해 강화된 분단 트라우마, 영남과 서울의 차별적 개발이 불러온 변방 트라우마. 이부분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어떻게 트라우마가 형성되고 강화되었는지 한번 정리하기에 좋았다.

저자의 분석은 깔끔했으나, 대안은 역시나 미약했다. 사실 이건 개인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저자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저자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한국인의 공통 트라우마는 정치문제로  기득권 수구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는 정치로 풀어야 하기에 현재의 한국상황에서는 그냥 한숨만 나올 뿐이다.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고 세대별, 또는 한국인 공통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해본다면 그나마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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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예의

한국에서 인문학이 붐이란다. 인문학은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을 읽고, 어떤 이들은 인문학 강의를 하러 다니느라고 바빠 보인다. 그런데도 사회가 갑질과 부정의가 묵인되는 분위기인 것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게 빠진 것 같다.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은 인문학을 공부하는걸까?

어떤 이들에게 인문학 공부는 장식품같다. 교양을 쌓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멋진 고전의 구절들과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는 게 정말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일까?솔직히 고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현학적인 단어들을 쓰는 사람을 보면 있어보이고 멋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서 멈추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대학원을 다닐 때, 나의 성격은 정말로 불 같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이 왜 그모냥이냐?  당시에는 아버지의 그런 핀잔에 억울해하며 철학공부는 인격도야랑은 상관없는 것이라고 항변했었으나 그런 아버지 덕분에 인격적 성숙을 가져오지 못하는 인문학이란 빈 껍질이라는 사실을 마음 한켠에 간직할 수 있었다. 인문학은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사람의 변화를 끌어내는 학문이며,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인문학 공부는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한 수단 같다. 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세계의 성공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성공과 인문학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문학이 돈 버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얼마 전 한 유명한 인문학 강사가 돈을 버는 것도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돈에 관심이 많기에 이를  고리삼아 사람들을 인문학적 논의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방식이 오히려 인문학을 자본주의의 도구로 자리매김시키는 것 같아 영 석연치 않다.

인문학은 교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성공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한 학문이다.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간이 이루어온 여러 공과를 성찰하며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게되면 타인에게 야박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인류들의 행위가 불러온 결과를 본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을 보면 타인에게 너무나 공격적이고 배타적이며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문학은 껍질만 유행하며 실제 인문정신은 여전히 저기 어디 먼지속에 쳐박혀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란 단지 형식적인 예의차리기가 아니다. 이는 자신을 포함한 타자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다. 어떠한 사람도 열등하지 않고 한 인격적 존재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질 때 인간 존중이 가능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가 비로소 제대로 표출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이고자 하기에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자만심과 우월감을 내려놓으며 건전한 자존감을 갖게 하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첫 걸음인 것이다.

어떤 인문학 공부를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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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인이라는 자각

며칠 전 갑자기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냥 그 사실이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난 그리도 자유로움에 대한 갈구가 컸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해도 그렇게 갇혀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것만 끝나면, 이것만 끝나면..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들처럼 아침저녁 출근하는 직장을 다닌 것도 아니었고, 자유로이 시간을 쓸 수 있는 대학원 생활을 참으로 오래했다. 대학원 마치고 미국까지와서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여유로와 보이는 삶이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일에 묶여 있기만 했다. 실제로 한가한 것은 아닌데, 줏대없이 낭비한 시간도 무수히 많았다. 그 무수한 시간 앞에서, 어떻게 일을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난 언제나 숨막혀 했던 것같다.

부모님과 함께 오래 산 것도 아마 그 숨막힘에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부모님의 조언을 감내해야했다. 박사를 마치고 강사 생활을 하던 시절, 난 춤에 빠졌었다. 탱고를 추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주말이면 밤늦게 들어올 때가 허다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셨다. 안정적 직장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하는데, 그렇게 놀고 다닐 때냐고. 물론 화가 났지만,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놀고 싶어도 부모님 눈치를 봐야했던 상황들 속에서 나는 숨이 막혔던 것 같다. 아직 경제적 독립을 얻지는 못했지만, 부모님 덕분에 미국에 와서 혼자살면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혼자사는 자유를 느끼고 있다.

어찌 보면 성격적인 면도 컸던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룸메이트와 살아보았다. 그들과 살면서 그들에게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밥먹고 나면 바로바로 설겆이 하고, 그렇게 나를 통제하며 살았다. 그러나 룸메이트들은 달랐다. 그게 한편 스트레스 였지만, 그로 인해 나자신을 볼 수 있었다. 전체에 위해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또는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룸메이트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싱크대에 설겆이가 쌓여있는 게 싫어서 가능하면 바로바로 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것, 그것 또한 이유였을 것 같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사회, 성취중심적 사회, 약자에 대해 냉정하기만 한 사회에서 길들여지다보니, 사회가 만들어 준 틀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집단에서 내 목소리를 내지 않는 편이었고, 이것을 끝내야만 쉴 수 있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었고, 약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것 같다.그런 조건과  나의 심약함과 겁많음이 결합하면서 언제나 나자신을 숨막히게 했던 것 같다.

며칠 전의 자각은 마침내 나에게 진정한 자유로움을 주었다. 이 많은 시간, 내가 무엇을 하든  그 선택은 나의 것이며,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을 하든, 미드를 보든, 여행을 다니든, 그림을 그리든, 노래연습을 하든, 요리를 하든, 잡글을 쓰든 그건 내 선택이다. 남에게 해를 주는 게 아닌이상 전혀 문제될 게  없다. 다만 그 시간에 내가 한 행동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내 몫이라는 사실은 기억해야한다. 자꾸 그 사실을 까먹고 눈 앞의 마시멜로를 종종 먹어버리곤 하지만.

그 자각 이후 난 하나의 모토를 세웠다. “매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자.” 이제 더이상 나는 딴짓을 하는 나자신을 구박하지 않는다. 다만 마시멜로를 참지 못하고 또 먹었네.. 라며 넘어간다. 이제는 일하는 게 즐거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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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심판론-이제는 버려야할 카드.

보궐선거 결과가 여당3, 무소속 1명으로 나왔다. 결과에 대해 언론들의 분석들과 썰이 난무하는 가운데, 재보선 결과를 성완종 리스트의 면죄부로 끌고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흥미롭게도  선거 전에 이미 보수계열 신문들을 위시한 많은 신문들이 우윤근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의 말을 인용하며”새누리당에 승리를 안겨준다면 집권여당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 없다.”라는 기사를  썼다. 우 원내대표가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소위 보수 언론들은 이미 보궐 를 선거를 성완종 리스트의 면죄부로 활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반면 진보계열 신문에서는 우 원내대표가4.29 재보궐 선거를 부패와 반부패의 구도로 이야기했다는 기사는 있지만,  면죄부운운 기사는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우 원내대표는 부패한 정권의 심판장으로  보궐 선거를 연결하며 정권 심판론의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비록 성완종 리스트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하더라도, 정권 심판론을 꺼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부패척결 문제는 선거와 연계되어서는 안된다.  부패는 법치주의의 원칙을 어긴 것이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요인이다.  그건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척결되어야 하는 별개의 문제이다.선거는 선거고 부패척결은 부패척결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두 문제가 연결될 수 있는가? 이 둘을 연결 시키는 것 자체가 정치가의 도덕성을 실종시키고 있고 무책임의 정치를 양산하고 있다.  게다가 국회는 입법부이지 행정부가 아니다.입법부의 사람을 뽑는데 비록 연루된 사람들이 과거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하더라도  정부의 전현직 실세들이 관여되어 있는 문제에 국회의원 선거를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킨다. 원래 문제는 부패척결인데,정권심판론으로 인해 판만 커지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공중분해되고 있다.

둘째, 부패 정권 심판론을 꺼내기에는 새정치 연합이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았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지난 정권동안 새정치연합의 핵심인사들의 도덕성문제가 도마에 올랐었다.  그 여파로 이미 많은 국민들에게 새정치 연합의 이미지는 새누리와 다르지 않은 부패정당이다.게다가성완종 사면 문제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부패정권 심판론은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딱 좋은 전략이었다.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세상에 털어서 먼지안나는 사람은 없다.과거 독재정권하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어도 군사독재에 저항하다는 것만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내세울 수 있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게다가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이 오래도록 써왔던 프레임이 ‘진보 진영 너희도 우리랑 똑같이 부패하지 않았나’하는 물타기 전력이었다. 이 상황에서 부패정권 심파론이 효과가 있을까?

셋째,  4군데 재보궐 선거는 국민 전체 대표성을 지니지 못한다.  전체 지역구 의석수 246명 가운데 겨우 4군데 지역 국회의원 선거가 어떻게 대표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그 가운데 두 군데는 오랜 기간 여당 우세지역이었다. 기본적으로 반타작을 하면 다행인 선거였고, 초기에 새정연도 1군데라도 이기게 되면 다행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새정치도 대표성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성완종 스캔들이 터졌다고 부패와 반부패의 정권 심판론을 들고 보궐선거에 대표성을 부여한 것을 오만하다고 해야하는 걸까? 부패관련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야할까?

사실 정권 심판론은 이미 두번 실패한 전략이다. 지난 대선과 지방 선거때 정권심판론으로 새정연은 두 번 다 실패 했다.새정연의 태도를 보면 아직도 그 부분을 지각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번 대선에서의 실패를 제대로 분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영향을 주었다 하더라도,그것을 넘어설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면,  결과는 달랐을 꺼다.  새정치연합의 대선 패배는 단순히 국정원 개입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이유는 새정연이  국민들이 원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새정연은 2/3정도의 국민이 지지할 정도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지 못했다.그런데 이번 보궐 선거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범했다.
정권심판론은 이제 유통기한이 지난 전략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이미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였다.기대에 부풀었던 민주화 정부 기간 동안 국민들이 체감할 만한 큰 변화를 끌어내지 못하고 현실과 적절히 타협했다.  칼을 뽑았어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니 오히려 국민 간의 대립 전선을 만들었다.  언론의 자유를 제공했지만, 그와함께 지켜야할 책임선이 있음을 같이 제공하지 못했었다. 성과는 있었지만,그것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게다가 체감 경제 효과가 크지 않았기에  사람들 사이에 개발중심의 산업화시대의 향수가 형성되었다.물론 거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지만, 그 결과 일명 정의감보다는 이익을 쫓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민 정서가 이렇게 변한 상황에서 정의감을 호소하는 게 먹힐까?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문제가 많은 정권 심판론을 들고 선거를 치렀으니 당연히 패배를 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안일하게 정권 심판론으로 이익을 보리라는 생각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새정연은 정권 심판론을 앞세워 일명 진보 세력의 큰형 노릇하려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나아가 과거 대선의 실패를 처절하게 성찰해야한다.김종인씨는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한 이유를 자신이 생각한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라 했다. 대통령이 된 뒤 박대통령이 대부분의 중심 공약을 파기하면서 경제 민주화도 물건너 갔지만,왜 대선 당시 새정연은 김종인씨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했는지,  이 부분도 생각해봐야한다. 단순한 우클릭이 국민의 지지를 얻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제 좌우의 구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새정치연합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자신들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지도전혀 모르는 것 같다. 매번 반복되는 물타기에 당하면서도 승산없는 정권 심판론을 들고나오며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매는 새정치연합을 보고 있자면,경청 능력,소통능력의 부재는 단지 박대통령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독재정권을 비판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새정연이 미래 한국에 대한 제대로 된 비전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걸 실천할 수 있음을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총선이든,대선이든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야당이 야당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미래 또한 밝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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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it a Feminist Act to Stay in a Patriarchal Tradition? by Gina Messina-Dysert

lucy:

This is very good topic. What if we added a female form to the holy figures of God…It could be an action for one step further. In Buddhism, Guanyin (Avalokiteśvara) changed its form to female in East Asia. Sometimes it has hermaphroditic form, for example, female body with mustache. We could write a new story about God.

Originally posted on :

Should women (or men) maintain a religious identity within a patriarchal tradition?  Is it a feminist act to stay? Or is it only a feminist act to leave?  These are questions that regularly surface in conversations related to religion and are often the center of dialogue here on Feminism and Religion.

I have often thought that change can only take place from within.  Certainly we can see the progress made by foresisters who have struggled within their traditions for change; Rosemary Radford Ruether, Mary Hunt, Amina Wadud, Judith Plaskow, and the list goes on.  These women have greatly impacted our understanding of misogynistic practices within their respective traditions and have educated us on how religions need to live out their teac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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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김리나 외, 한국불교미술사(조각부분)

한국불교미술사를 한눈에 훑어보기에 좋은 책이다. 한국불교미술을 조각, 회화, 공예 세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을 그 시대의 사조, 재료와 제작기법, 후원자로 나누어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맨 뒤에 용어해설을 덧붙여서 처음 불교미술사를 접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도와주고 있다.

나같은 초심자에게 조각의 시대적 특징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수인(손 모양)이었다. 옷자락이나, 얼굴모습, 전체 비율등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건 좀 섬세해서 지금 수준에서 내가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인을 중심으로 일단 정리하고자 한다.

5C  불상의 경우 두 손을 마주잡은 선정인 좌상(앉은 모습)이 유행했던 반면, 6C 불상은 오른손을 두려움이 없게 보호해준다는 시무외인과 왼손은 소원을 받아주는 여원인을 가진 일명 통인(두 수인을 합쳤다하여)의 입상(서 있는 모습)이 유행했었다.   6C 말에는 불상 뒤에 전체 광배(아우라를 상징하는 판)가 있고, 다른 두 부처(아미타불과 미륵불)이 함께 있는 삼존불이 유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금동불 뿐만 아니라 마애불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수인은 통인이다.

7C 의 불상은 수대 영향을 많이 받아서 U자형 주름 처리가 단순화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지역에서는 오른손에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보주를 들고 왼손은 시무외인을 취하는 새로운 수인이 등장하였다. 또한 이 불상들은 이전의 U자형 옷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엉덩이를 살짝 올리고 있다. 이는 굽타시대의 삼굴형태(S자형)의 영향으로 보이며, 동남아시아 조각과의 교류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 백제에는 6C,  신라는 7C  미륵보살의 반가사유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미륵불이 , 이는 정토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한다.

7C 후반부터는 전법륜인, 합장인을 한 입상이 등장했다. 인도의 영향을 받아 서있는 다리위에 대칭의 옷 주름이 있는양식과 오른손은 설법인의 수인을 하는 입상이 있었다. 좌상의 경우 항마촉지인(오른손을 땅에 닿게 하는 수인, 석굴암 본존불의 수인)의 형태가 소개되었다.

8C 중반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이 소개되었는데, 중국과 일본의 경우 밀교주존으로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화엄 사상의 틀안에서 비로자나불상이 이해되고 실제로는 선종중심의 불교 사찰에 봉안되고 예배되었다. (p.65)

9C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7C에 소개되었던 약사불이 대중에까지 널리 퍼졌다. 약사불은 왼손에는 약합이 올려져 있으며, 오른손은 당시까지 전해졌던 수인들, 시무외인, 여원인, 설법인, 항마촉지인이 조성되었다. 이는 통일신라 말의 질병퇴치와 관련한 현세구복성의 신앙형태와 관계가 있을 거라 한다.(p.68)

고려초기는 기존의 양식을 계승하며  철불이 많이 주조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금동불과 석조불 주류였는데, 통일신라시대 후대부터 철불이 추가되어 고려 때 성행한 것이다. 또한 조각의 예술적 우수성을 감소된 거석불이 등장하며 불상후원자의 권위를 과시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p.80)

고려 중기 11-13C 에는 남송,원나라의 영향으로 영락을 두른 불보살상이 나타난다.

고려 후기 원나라  통치기에는 티벳풍의 불상이 대거 수입, 제작되고, 아미타상이 유행했다. 많은 불보살상이 아미타수인을 취하고 있다. 나아가 천수관음보살좌상도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조선시대는 이전시대를 계승하면서 독자적 조선불상의 형식을 갖추어갔다. “불신에 비해 머리가 커지고, 사각형의 얼굴에 이목구비 표현도 직선적으로 변화하며, 통견의 법의 옷주름은 몇가지 형식으로 굳어져서 계속 답습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p.101)고 한다.  그리고 아미타삼존불( 대세지/관음, 지장/관음) 석가삼존불(보현/문수) 외에 삼신불(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이나 공간적 삼세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불)을 모신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건칠불, 목불 외에 흙으로 만든 소조불들이 17세기 이후 성행했다.

조선시대 때 대중불교의 신앙대상으로 유행했던 것은 사후 세계 다스리고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과 그 권속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대중 업보 다스리는 시왕상, 그리고 고승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십육나한상이다. (p.12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지장보살과 지옥과 관련된 시왕상의 더욱 유행했었다고 한다.  나한은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정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도와주는 존재이므로 이 또한 두 전쟁의 여파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흥미로왔던 것은 불상 안에 복장이라 하여 발원문을 비롯하여 오장육부를 천으로 만들어 넣기도 했다. 이는 불상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주술적 힘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김리나 외, <한국불교미술사>, 미진사, 2011

수인

수인그림 출처: http://www.shilla.or.kr/sub7.html?post_code=3&cate_code=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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