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화가 빈센트

어제의 화창한 하늘과 달리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되었다는 보 르 비 콩트 성(Vaux-le-Vicomte) 투어를 예약해 둔 터라 만나는 장소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 앞인 줄 알았으나 장소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화를 걸고, 길 가에 있는 한 호텔의 리셉션 데스크에 물어 물어,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만나는 장소인 투어 여행사에 도착했다. 늦어서 어쩌나 하면서 안내 데스크에 물어보았더니, 이런! 취소되었단다. 파리에서 머무는 숙소가 공짜 인터넷이 안 되는 통에 메일 확인을 못했더니 이런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세찬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허탈했으나, 여행사 사무실에서 공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는 말에 여행에 필요한 지도를 다운로드하으며 젖은 옷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옷을 어느 정도 말린 후 비 오는 날에는 미술관이 좋을 듯하여 피카소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름 아침이라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갔으나, 표를 사기 전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이 비용을 내고 들어갈 만큼 피카소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가 단지 유명한 사람이어서 전시회를 보고 싶은가?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 잘 이해가 가는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과감히 미술관을 떠나 나왔다.  피카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아즈 마을로 건너가는 지하도

목적지를 잃은 후 잠시 고민하다 파리 북역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마을로 가는 직행 기차가 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북역에 도착했다. 기대와 달리 안내 데스크에서는 반 고흐의 마을을 알지 못했고, 기차역으로 지하철역으로 이리저리 뛰다가 운 좋게 기차역 고객센터 안내요원의 도움을 받아 마을 이름을 찾았다. 오베르 쉬르 오아즈(AuversSur Oise). 지금도 외워지지 않는 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이며 표를 잘 샀는데, 개찰구 직원의 농간(?)으로 10분 정도를 헤매다 간신히 기차를 탔다. 상황은 이랬다. 표를 보여주고 타기 전 개찰구 여자 직원에 게이 곳이 타는 곳이 맞냐고 물었는데, 매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이곳이 아니라며, 플랫폼 10으로 나를 보냈다. 찾아간 플랫폼 10에서 다른 승무원이 내가 왔던 방향의 플랫폼을 가리키며 저쪽이 맞다고 했다. 결국 먼저 갔던 개찰구의 다른 남자 직원에게 묻고서야 기차를 제대로 탈 수 있었다. 힘겹게 기차를 타고나서, 머릿속에 프랑스어 못하는 외국인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의 오해인지는 모르지만, 그 직원이 나를 일부러 골탕 먹인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머, 빈센트 반 고흐의 마을로 가는 기차를 탔으니까.

내가 탄 기차는 직행이 아니었고, 오베르 쉬르 오아즈로 가기 위해서는 한 번 갈아타는 일반 기차였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기차는 매우 한산했고, 나중에는 나 혼자  기차 칸에 타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오아즈 역에 내리자 인상파 풍의 그림들이 나를 반겼다. 그림들이 그려진 지하도를 건너 기차역을 나오니 아름다운 전원 마을이 펼쳐졌다. 역 근처 공원에는 고흐의 동상과 길바닥의 빈센트라는 이름이 새겨진 표식이 이 곳이 고흐의 마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공원 옆에는 마을 관광 안내소가 있어서 지도를 얻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고흐가 머물던 여관(Auberge Ravoux)이 있었고, 여관에 들어가기 위해 표를 사고 시간이 되기까지 마을을 좀 더 둘러보았다.


내가 피카소가 아닌 고흐를 택한 데에는 내가 유난히 고흐의 팬이어서는 아니었다. 피카소보다는 조금 더 관심 가는 화가. 그 정도가 고흐에 대한 내 태도이다. 유명한 사람 고흐가 내 삶에서 조금 다르게 인식된 것은 어느 대학원 선배의 고흐 그림에 대한 코멘트 때문이었다. “고흐의 그림 멋지지 않니? 변화하는 세상을 흐르는 듯한 붓터치로 그리다니 말이야.”당시 나는 불교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선배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고흐가 본 세상이 깊이 수행하는 이들이 보는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불교에서는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찰나찰나 변한다고 한다. 다만 우리의 의식은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순간순간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 보면, 그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 변화의 연속적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고흐가 흐르는 듯한 그림을 그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선배의 그러한 코멘트로 인해 고흐는 내 세계와 연결되었다.

고흐의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그림보다는 그의 삶에 있었다. 생전에는 평생 그림 한 점 밖에 팔 수 없었던 무명의 화가가 죽은 지 백 년 뒤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되어 버린 그의 슬픈 삶 때문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좌절감과 우울감에 힘들었던 상황이었기에 스스로를 실패자로 생각하고, 우울하게 세상을 살아가던 그가 살던 곳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우울해지고 싶어서 우울한 곳을 찾아 유럽여행을 왔다는 어느 여학생처럼, 나도 나의 아픔과 공명할 수 있는 이, 아니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던 이가 살던 곳을 찾아 자석처럼 끌려왔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빈센트 표식

2:30분. 고흐가 머물던 여관방에 들어가 보았다. 작은 방에 침대와 세면대가 달랑 하나. 그 방에서 그는 매일매일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꿈은 그 방에서 작은 개인 전시회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묘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사후에 그의 그림은 세계의 유명 미술관에 항상 전시되어 있고, 특별전 때는 세계 곳곳의 전시관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이러니. 그는 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후에, 그것도 1-2년 뒤도 아니라 수십 년 후에 빛을 보게 되는 게 그에게는 의미나 있을까?

  여관방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고흐는 자살한 게 아니라 동네 불량배에게 죽음을 당한 것일 꺼라 한다. 그 근거로 그가 죽기 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를 보여주었는데, 그곳에서 오아즈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기분도 훨씬 좋아졌고, 그림의 영감을 많이 얻어 행복해하던 그가 자살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자살이 아니라 타살일 수 있다는 이야기에 약간의 희망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렇게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무명화 가는 죽었다. 아마 당시에 여관에서는 그의 죽음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곳을 6유로의 입장료를 받으며 보여주고 있다. 세상이란..

 여관방을 나와 마을 안내소 뒷길(RueDaubigy)의 담벼락을 따라 오아즈 마을을 구경해보았다. 하늘이 흐릿하고 때 로비가 내리긴 했지만, 아래쪽에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길 옆에 자리 잡은 집들은 이뻤다. 마을이 너무 이뻐서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마을은 고흐뿐만 아니라 다른 인상파 화가에게서도 사랑받았던 곳으로 세잔, 피사로 등이 여기에서 작품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반 고흐가 그린 들판이 마을 근처라 해서 걸어가다가 너무 멀어 포기하고 고흐의 무덤으로 향했다.

고흐의 무덤으로 가는 곳에 반 고흐가 그린 유명한 오아즈 교회를 만나 인증숏을 찍고, 무덤이 있는 공중 묘지로 걸어갔다. 비가 왔던 흐린 날이어서인지 올라가는 길의 들판이 왠지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올라가서 고흐의 묘지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고흐의 무덤을 찾아온 듯 해 보이는 여행객이 보여 뒤따라 갔다. 그녀는 한순간의 헤맴도 없이 고흐의 무덤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담쟁이로 덮여있는 고흐의 무덤은 동생과 함께였다. 평생 형을 뒷바라지 해준 동생과 그 도움을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고흐, 어느 누구도 고흐의 그림이 갖게 된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고흐와 나와는 의도치 않은 인연이 종종 있어왔다.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에 갔을 때 내가 제일 처음 본 유명한 서양화가의 그림이 고흐의 자화상이었고, 미국 유학시절, 학생들의 주택 협동조합 주택에 입주했을 때,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던 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 퍼즐이었다. 분해되어 있는 퍼즐을 다시 맞추고 뒤에는 녹테 이프를 붙여 유학기간 내내 벽에 붙여 놓고 살았었다. 이번 배낭여행 때에도 오아즈 마을을 넣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원래 일정에서는 빼 논 것이었는데, 이렇게 우연처럼 우여곡절 끝에 그가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마을을 방문했다. 이번에 오아즈 마을에서 만난 고흐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꾸준히 꾸준히 하라고. 꿈은 죽은 이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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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앙뜨와네트의 집을 찾아서

쁘띠 뜨리아농

 

어릴 적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책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마리 앙뜨와네트의 남장 여성 경호원 오스칼 프랑소와 드잘즈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그녀의 삶과 사랑을 다룬 이야기로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가 그렸다. 얼마나 그 만화 주인공을 좋아했는지, 주인공의 얼굴 그림을 가지고 있고 싶어서 친구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기 전에 기름종이를 대고 주인공의 얼굴을 베껴 그렸을 정도였다. 요새야 복사가 흔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너무나 쉽지만, 당시는 복사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진기는 초등학생 꼬마 여자애가 만지기에는 너무나 귀한 물건이었다. 그 만화로 인해 내 기억 속의 마리 앙뜨와네트는 귀엽고 친근한 왕비였고, 베르사유 궁은 나의 만화 속 친구가 사는 낭만적인 곳이었다. 당연히 나는 베르사유 궁전이 보고 싶었고, 과감하게 궁전 입장을 포함한 자전거 투어를 신청했다.

파리 자전거 사무소에 모여서 인솔 가이드와 다른 조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지하철을 타고 베르사유로 이동했다. 2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가이드랑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가이드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으로 대학에서는 지리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프랑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젊은이였다. 자전거 투어 가이드는 그의 주말 아르바이트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오기 전에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며 반가워했다. 대학에서 졸업한 청년들이 모국에서 전공을 살려 취직하지 못하고 외국을 떠도는 것은 단지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나마 영어권 출신이 사람들은 영어를 가르칠 수 있으니 행운이라 해야 할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베르사유역에 도착했다.

베르사유는 작은 시골 도시였다. 자전거 보관소로 이동하여 자전거와 자전거 바구니를 하나씩 받아 들고 베르사유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광장과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시장 건물에는 야채, 고기, 과일, 생선 등을 팔고 있었고, 광장에서는 옷과 신발을 파는 노점상들이 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맛나 보이는 먹거리들이 많았지만, 혼자 배낭여행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빵, 오렌지, 체리, 자두 정도만 간단히 샀다. 화장실을 가려했으나 찾을 수 없어서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갔는데, 화장실을 사용하려면 전용 동전을 사용해야 했다. 결국 그곳에서 물을 한 병 사고, 화장실 입장할 수 있는 동전을 받았다. 유럽은 정말 화장실 사용에 야박하다.


시장에서의 쇼핑을 끝내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베르사유 궁 영지로 들어서자 길고 크게 자란 정원수들이 양 옆에 늘어선 넓은 길을 나왔다. 가로수 뒤로 넓은 평원이 보이는 탁 트인 길을 자전거로 달리니 앞에서 바람이 불며 땀을 식혀 주었다. 그 길에서 만화 속의 마리 앙뜨와네트처럼 드레스를 입은 두 명의 여성을 보았다. 아마도 기차역 옆에 있던 드레스 대여점에서 옷을 빌려 입은 것이겠지만, 그 둘을 보면서 순간 마리 앙뜨와네트가 살던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리 앙뜨와네트가 마차를 타고 다녔을 길을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니… 내가 마리 앙뜨와네트가 살던 그곳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가이드를 따라 마리 앙뜨와네트의 개인 궁으로 알려진 쁘띠 뜨리아농 (Petit Trianon)에 갔다. 루이 15세가 자신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은 별궁인데, 정작 그녀는 완공 전에 죽어서 그곳에 살아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완공 이후 퐁파두르 부인의 뒤를 이은 왕의 또 다른 정부, 드 베리 부인이 살고 있었는데, 루이 16세가 마리 앙뜨와네트의 개인 공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쓰라고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궁전에서 그녀는 왕실의 모든 압박을 벗어버리고 모든 것을 그녀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루이 16세조차 마리 앙뜨와네트의 허락 없이는 입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왕비의 행복을 위해 별궁을 내준 루이 16세는 마리 앙뜨와네트를 매우 사랑했던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당시에 유행인 정부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쁘띠 뜨리아농의 백미는 정원 안쪽에 지어 놓은 마리 앙뜨와네트만의 전원마을이었다. 그 공간에는 프랑스 농가주택들이 지어 있고, 호숫가에 동화책에서 나올 것 같은 탑이 있어서 마치 동화 속 마을 같았다. 작은 호빗마을 같은 그곳에서 마리 앙뜨와네트는 평민의 옷을 입고 농사도 짓는 등 평민 놀이를 했다고 한다. 새롭게 알게 된 그녀의 독특한 취미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성들과 잘 소통할 수 있었을 것 같던 그녀가 백성들의 혁명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쁘띠 뜨리아농의 전원마을

다시 가이드를 따라 피크닉의 장소인 그랑 카날(Grand Canal)로 향했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좁은 길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평평하고 넓은 길에 차가 다니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기에 참으로 좋았다. 배를 띄우며 놀기 위해 만들었다는 그랑 카날은 정말 거대했다. 카날 끝에 도착하니 저 멀리 맞은편에 베르사유 본궁이 보였다. 카날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그 크다는 베르사유 본궁이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술을 띄우며 시를 짓는 놀이를 하던 포석정은 거기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의 규모였다. 그 거대한 카날을 보면서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대한 궁전과 여흥을 위해 사용했을 엄청난 비용을 생각해보면, 혁명이 더 일찍 나지 않았던 거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었다.

그랑 카날을 마지막으로 다시 자전거 보관소에 가서 자전거를 돌려주고 베르사유 궁전, 본궁으로 향했다. 궁전의 굳게 닫힌 문 앞의 광장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배고픔을 호소하던 어머니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그곳에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라는 말은 마리 앙뜨와네트가 한 말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가 거리의 배고픈 아이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슈를 주시오.”라고 했던 말을 혁명군이 왜곡시킨 것이라 하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 말을 왜곡시키는 것은 국가를 떠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불쌍한 마리 앙뜨와네트. 실제로 그녀는 이전 왕비들에 비해 돈도 적게 쓰고, 배우자인 루이 16세도 검소한 삶을 살았다는데, 이미 파탄난 왕실의 재정과 여러 오해들로 불쌍하게 생을 마감했다. 둘 다 이전 왕과 왕비에 비하면 서민 친화적이었었는데,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공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베르사유 본궁에 들어가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내게 묘한 설렘을 주었다. 마리 앙뜨와네트, 마담 퐁파두르, 태양왕 루이 14세 등 내가 아는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이 복도를 지나다녔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너무 기대한 탓인지, 아니면 화려한 건물들을 이전에 너무 많이 본 탓인지 궁전 내부의 모습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보였다. 유명하다는 거울의 방은 처음에는 거울의 방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다가 나중에 그곳이 거울의 방임을 알고 당황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거울이 귀하고 비싼 물품이었기에 그 정도의 거울을 사용한 거울의 방이 명물이었겠지만, 평소에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유리들로 지어진 높다란 건물들을 보고 살다 보니 그곳의 거울은 조금 조야하다 생각되었다. 베르사유 벽과 천장의 장식들이 아름답기는 했으나, 오페라 가르니에(파리 가르니에 오페라극장)에 비하면 크기만 클 뿐 화려함은 덜했다. 가르니에 극장을 설계한 사람이 베르사유의 화려 움을 넘어서는 인테리어를 추구했다던데, 그가 확실히 성공했다.

베르사유 본궁의 정원은 그 자체로도 넓었다. 한가운데 길 양 쪽 옆에 길게 늘어선 정원수들과 그 뒤에 펼쳐진 15개 에이르는 작은 숲(Grove)들은 단 시간에 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금세라도 말이 뛰어나올 것 같던 중앙의 아폴로 분수, 음악에 맞춰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분수쇼를 보여주던 거울 분수(Mirror fountain) 등 10개의 분수는 정원에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원의 길은 넓고 분수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지만, 약간은 외진 느낌이 들어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정원을 마지막으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왔다. 베르사유 궁전 여행은 유난히 내가 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아마도 내 기억 한편에 어린 시절 만난 마리 앙뜨와네트가 살아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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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인가

유럽 배낭여행은 오래전부터 내가 동경해왔던 꿈이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 배낭여행과 해외연수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제나 꿈만 꾸었지, 한 번도 진짜 이번엔 가보자 하는 생각을 못했다. 딱 한 번, 친구에게서 일주일 뒤에 유럽으로 여행을 가지는 전화가 온 적이 있었으나 농활을 간다는 이유로 포기했다. 그 이후에는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기억 저 편에 묻어 두었었다. 이번 여행은 시간은 있으나 돈은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리해서 가기로 했다. 몇 달 간이 우울과 며칠 간의 죽음의 욕망을 떨쳐버렸을 때, 의욕 상실이었던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유럽 배낭여행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왜 그토록 여행을 가고 싶어 했을까?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떠남과 휴식이었다.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벗어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래서 알아보았던 곳이 프랑스의 플럼 빌리지였다. 틱낫한 스님이 운영하는 유명한 수행처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었다. 한국의 많은 수행처를 놔두고 은행에 얼마 남지 않은 비상금을 써가며 가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 대신, 견문을 넓히는 방향으로 여행의 목적을 바꾸었다. 또한 늦은 나이에 여자 혼자서 가는 배낭여행의 경험을 통해 나의 생존본능을 일깨우고 싶어 졌다. 한 달간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나면,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여행의 목적은 휴식이 아니라 모험과 도전이 되었다.

그러면 왜 다른 나라가 아니라 유럽일까? 세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 가까운 중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페루, 브라질, 이집트… 그 많은 나라들, 심지어 가까이 있는 나라들을 두고 난 왜 유럽으로 가려고 하는 걸까? 이 질문은 출발 전, 나를 괴롭혔지만, 당시에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여행 중에 만난 여행자들과 유럽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우연히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얻었다.


유럽을 여행면서 많은 여행객을 만날 수 있었고 가끔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로스타를 기다리며 만난 호주에서 온 노부부는 평생의 소원인 유럽여행을 왔다며 너무 기뻐했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오래전 살았던 유럽이라는 곳을 직접 보고 싶었다고 했다. 여행 중간중간에 호주에서 온 젊은이들도 몇 만났는데, 대부분이 넉 달 정도의 달 이상의 긴 여행을 하고 있었다. 호주는 유럽에서 너무나 멀기에 호주인들은 그렇게 장기 휴가를 얻어서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호주인들도 한국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대만에서는 영어를 가르쳤었다는 중국인 친구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식당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대만에 돌아가기 전에 여행을 하고 있었다. 특정 음악제에 참여하기 위해, 또는 비디오 영상 채팅에서 알게 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왔었다는 일본인도 보았다.

유스호스텔에서 머무르면서 나 홀로 여행하는 젊은 한국 여성들도 만났는데 각각의 여행의 사연은 비슷한 듯 달랐다. 한 친구는 대학 졸업 후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들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맘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머물러도 된다며 적극 지지해 주셨다고 하였다. 갑갑한 한국의 취업 현실 속에 희망을 꿈 꾸며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젊음이 못내 부러웠다. 아직 그녀는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이룰 수 있다는 부러움이었다. 직장인으로 여유를 가지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직장을 다니다가 모네의 그림이 너무 좋아서 실제 장소를 직접 보고 싶어 온 친구도 있었고, 영국에서의 한 달 연수를 마치고 귀국 전 짧은 파리 여행을 온 사람도 있었다. 대학생들 가운데에는 1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유럽여행을 온 여학생이 꽤 많았다. 이제 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정도 되었다는 여학생은 여행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고 빨리 흘러가서 예정한 45일이 너무 짧다고 아쉬워했다. 한편 여행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또 다른 여학생은 외로움과 여독으로 약간 지쳐서 생각이 많았다.

“얼마나 머무세요?” 내 가물 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요. 한국에 가게 되어서 기뻐요.”

“여행이 재미없었나 봐요?”

나의 이어지는 질문에 그녀가 대답했다.

“여행 초반에는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명한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다가 어느 순간 지쳐버렸어요. 남들 다 하는 것 하러 여기에 왔나… 여기 오기 전 프라하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는 너무 좋았어요. 골목골목 돌아다니는 것도 좋았고, 외국 친구들과 패러글라이딩도 하러 갔고, 제 여행을 하는 것 같았어요.”  지쳐서 한국에 돌아가게 돼서 기쁘다던 그녀였지만, 프라하의 일을 이야기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 자신만의 여행. 그녀는 여행 끝자락에서 아주 소중한 경험을 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나를 여행 전 질문으로 이끌었다.  ‘왜 난 유럽에 왔을까? 또는 가려고 할까?’ 해마다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많은 이들이 에펠탑, 개선문, 런던 타워 등 사람들이 말하는 유명한 곳에 가서 사진 찍고, 사람들이 맛있다는 파리 뒷골목 맛집에 가서 인증샷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나 또한 그런 천편일률적 여행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을 안 보고 올 수는 없는 것이니까. 여행 전에는 밀레 그림을 보고 싶어 하던 그녀처럼 순수하게 자신만의 여행을 짜고 싶었지만, 첫 여행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선택 아래에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고,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욕망, 남들이 하는 것을 다 해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나라가 아닌 유럽에 가게 된 데에는 나의 무의식적 욕망, 많은 이들이 가본 그곳을 나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의 역할도 컸다.

또 다른 이유는 내 안에 각인된 유럽에 대한 동경이었다. 베로나에서 미국에서 룸메이트로 같이 살았던 폴란드 친구의 집에서 머물렀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하던 중, Truffle mushroom이 화제가 되었다. 그 버섯 이름을 듣는 순간, 오래전 동화책에서 돼지를 이용해 채취하는 귀한 버섯이라는 읽었던 기억이 났었다. 이번 여름을 지나면서 청와대 정찬에 사용되었다며 Trufflemushroom(송로버섯)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지만, 내가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그 버섯은 그리 유명한 버섯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Truffle mushroom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유럽 동화책을 참 많이 읽었었다. 오래전 일이라 까먹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이국적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 안에는 유럽에 대한 궁금증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기에 유럽의 교회 문화에 대해 약간의 고향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교황의 나라인 바티칸 시티와 프란체스코 성인이 살던 아씨시를 방문하면서 먼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었다. 마치 호주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듯 유럽을 가는 것처럼, 나는 몰랐지만, 내게도 그런 비슷한 감정과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휴식, 재충전, 생존본능의 회복, 견문을 넓히는 것 등 내가 표면으로 내건 이유는 많았지만, 결국 이 여행은 내가 나의 무의식과 마주하고 오랜동안의 숙원을 푸는 자리였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지만, 성장과정에서 서구의 세례를 흠뻑 받았던 나는 유럽에서 잊고 있던 나를 만났다.

originally published at https://brunch.co.kr/@lucyatti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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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김선우 발원

김선우의 발원은 원효의 일생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원효에 대한 글들을 써야해서 머리를 식힐 겸 고른 것도 있지만, 유명한 재야철학자와 정혜신 의사가 추천해서, 그리고 문제가 된 재야철학가의 의상 폄하에 대해서도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주인공이 원효와 요석이고 배경이 신라시대일 뿐이지, 지금 사회운동가들의 애환(?)을 그려낸 소설이다.

육두품 출신인 원효는 화랑이 되기 위해 서라벌에 갔다가 권력욕이 강한 인물 야신이 계략에 의해 위기에 빠지고, 자신을 도와준 백제군을 살려 화랑될 기회를 포기하고 출가한다. 수행하면서도 부정의한 일은 외면하지 않고, 소외된 이들의 마을 아미타림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회참여적 삶을 산다. 이 책에서 요석은 매우 적극적인 여성으로, 어릴 적 원효와 한 번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졌고, 아미타림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원효를 지켜보는 사랑을 한다. 원효의 파계와 관련해서는 아버지 김춘추의 야망에 의해 정략결혼을 하게 된 요석이 과부가 된 이후 삶을 망가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는 원효의 애틋한 마음으로 표현했고, 그들의 사랑을 완전한 결합으로 아름답게 묘사했다.

이 책에서 요석은 귀족 출신이지만,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착한 사회운동가이고, 원효는 부정의에 핍박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부정의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핍박속에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원효, 그래서 정혜신 의사가 힐링 서적이라고 극찬한 듯 했다. 중간중간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당시의 사건으로 변환시켜 삽입하여, 권력층의 피지배 계층의 핍박, 당시 권력층과 원효와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가 공사하다 깔려죽은 분황사 지장전 참배를 요구하며 높은 불상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하다 죽은 여자아이, 원효와 요석과 함께 하다 탄압받는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마을 아미타림 등등 발원을 읽는 내내 신라시대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또한 문제가 된 추천서는 단지 철학자가 의상을 폄하하기 위해 단순히 개인적 의견을 피력했다기 보다는, 소설 속 구도를 좀 극명하게 드러내고, 부연 설명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한다.  소설 속에 의상은 국사자리를 받기로 약속하고 대신에 원효를 당나라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은 인물로 나온다. 소설에서 의상과 원효를 권력에 부합하는 인물과 권력에 저항하는 인물로 대비해 놓았으니 추천서에서 의상을 권력영합적 인물로 몰았다는 것만 비판하는 것은 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 추천서는 의상을 좀 많이 폄하하기는 했다.

전체적으로 시대를 반영해서 원효를 재구성했다는 점, 요석공주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은 새롭고 흥미로왔으나, 선악의 대비가 너무 단순하고, 원효와 요석 등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인데다가 역사적 배경과 주인공만 가져왔을 뿐 내용은 현대한국사회를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처음에는 읽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글이 흡입력이 있었다. 김선우 작가가 글을 참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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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의 굿판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언제 국회 본회의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을 보겠습니까?”

아크로 게시판에 남겨진 이 댓글만큼 현재 필리버스터에 대한 국민의 열기를 잘 설명하는 표현이 있을까? 필버에 대한 열기는 2002년 월드컵,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생각나게 한다. 필리버스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흥분은 그동안 야당지지자들과 국민들이 얼마나 이런 공간을 목말라했는지 반증하고 있다.

한국민중들은 오래전 부터 지배세력에 대한 불만을 마당극의 해학과 굿판의 흥겨움으로 풀어왔다. 필리버스터를 보면 그동안 이명박근헤 정권을 통해 쌓아왔던 불만들을 쏟아내는 굿판 같다. 굿판의 무가를 들으며 사람들이 그동안의 힘겨움을 해소하고 하나되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제사장이 되어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울고 하나라는 동질감을 얻으며 결속을 다진다.

필리버스터는 쇼다. 처음 필리버스터를 한다고 했을 때, 더민주는 심각한 악법인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막기위한 최후의 카드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그런데 뒤늦게 드러나는 사실에 의하면, 더 민주는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에는 적극 동의하고 있었다. 더 민주에서 필리버스터를 하는 목적은 수정안 논의의 시간을 벌기위한 것이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냥 끝장 토론으로도 될 텐데, 왜 극적인 필리버스터가 필요했을까? 한달 전에 이미 예고되었던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가 야당 자신들을 위한 쇼였는지, 국민을 위한 쇼였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국민들이 즐기고 있으니 국민들을 위한 멋진 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댓글과 사람들이 열광적 반응이 보여주고 있듯이 필리버스터는 지난 정권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SNS와 야당을 지지하는 신문들은 일괄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칭송하고 있다. 연설을 한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표현은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의도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야당 신진 정치인들의 얼굴알리기 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법안의 통과결과와 상관없이 필리버스터는 한국의 정치 역사를 새롭게 쓰게될 것이다.

불행히도 필리버스터 굿판은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대동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여론의 팽팽한 대립은 완충지대 없는 한국정치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새누리당이 북한 미사일과 사드배치논의로 지지자들을 결집했던 것처럼, 더 민주는 필리버스터로 지지자를 결속시키고 있다. 마치  종교지도자가 부흥회를 통해 신도들의 결속을 강화시는 것같다.

얼마 전 강준만 교수도 이러한 한국 정치의 종교화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지도자 중심주의가 한국정치의 종교화를 이끌고 있으므로 인물 중심이 아닌 이슈 중심으로 논의를 해보자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가 만들어낸 상황을 보면, 문제는 단순히 인물이 이슈로 옮겨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 문제의 해결은 정치를 어떻게 규정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 정치를 재화를 배분하기 위한 타협과 상생의 기술로 보느냐 아니면 (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 승리의 수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갈등을 푸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필리버스터와 이에 대한 열광은 현재 한국 정치가 어디에 서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중간지대는 사라지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타협과 상생은 사라지고 전쟁과 죽음을 각오한 결기만 남은 정치. 과연 필리버스터의 굿판은 앞으로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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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판타지 소설의 영감의 원천

영국에는 환타지 계열의 유명 작가들이 많다. 의 J.R.R. 톨킨, 의 C.S.루이스, 의 루이스 캐롤, 그리고 유명한 의 J.K.롤링. 그들의 소설을 읽었을 때 어떻게 이러한 상상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영국의 풍광을 보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환타지 세계는 기존에 익숙한 것들에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한 것이었었다.

영국은 구릉이 참 많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바람이 쎄다. 영국의 바람부는 언덕과 때로는 조금 음울한 날씨는 이라는 소설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을 설정해 주었고, 사람들에게 구릉 안에 사는 생명체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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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아래서 책을 읽는 장면이었는데, 영국에 가 보니 나무그늘만큼 책 읽기 좋은 곳이 없어보였다. 한여름 햇볕은 너무 따갑지만, 그늘은 선선한 영국의 기후 상 나무그늘을 휴식을 위한 좋은 곳이고, 나무의 생김새 또한 낮으면서도 약간 아래쪽이 퍼진 형태라서 그늘도 넓게 만들어주면서 아늑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도 잘 보면 책읽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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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다니면서 앨리스에서 느꼈던 이국적 풍광이 사실은 나에게만 이국적이었지 영국인들에게는 일상적이며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래 고양이는 동생네 집근처 펜스 위에서 본 것인데, 앨리스에서 느꼈던 체셔고양이 그 자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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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의 여왕의 나라에서 보는 퍼즐식 정원이라든가, 양옆의 거대한 정원수의 뒤에 보이는 궁전은 영국 왕궁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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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곳곳에 작가들이 문학적 영감을 받은 곳이 존재하지만, 환타지 소설과 관련해서는 옥스포드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기숙사 시스템은 옥스포드의 칼리지 시스템을 조금 변형시킨 것으로, 옥스포드에서 칼리지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함께하며 대학생활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저녁 정찬 시간이었는데, 칼리지의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공식 대학 가운을 입고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한다. 다행히 현재는 의무는 아니라고 한다. 단지 옥스포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스템 뿐만 아니라, 몇몇 장소 또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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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여행하면서 상상력의 뿌리는 결국 일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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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논리를 당연시 바라보는 나를 보다.

몇달 전 친구었한명이 미국내의 시간강사 처우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링크했었다. 정규직의 절반보다 적은 금액과 불안정한 상황. 그 상황 자체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켠에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경쟁할 기회라도 주어지니 그게 어디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종교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가을은 한창 여기저기 직업의 원서를 낼 시간이다. 이번에 아시아 종교와 불교 통틀어서 조교수 자리가 13군데 나왔다. 2015년도는 유난히 일명 한국인들에게는 듣보잡인 대학들보다는 유명한 대학들이 많아 기존에 작은 대학에서 일은하는 사람들도 원서를 낼 것이기 때문에  경쟁이 더욱 심하겠지만,  그래도 13군데가 어딘가. 한국에서 온 나에게 이들의 상황은 천국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이쪽 분야 4년제 대학 조교수 자리는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이 52개 주로 구성된 나라라는 것과 한국의 크기는 미국의 주 하나정도거나 그보다 작다는 상황을 고려해보면, 한국에서 4년마다 1군데가 열리는 것이라 답답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서는 13군데가 어딘데,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게 어딘데.

시간강사 월급도 한국에 비하면 좀 많긴 한데, 더 큰 문제는 한국은 그나마 나라가 작아서 여러군데 시간강사를 뛸 기회라도 있지만, 미국은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보스턴을 제외하고는 도시마다 학교 수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학기 버지니아대에서 한학기 시간강사를 해봤다. 정말 딱 4개월 최저 생활비였다. 그나마 버지니아대는 이 근처 대학에 비해 많이 주는 것인데, 나 혼자였기 때문이지 딸린 식구가 있다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당연한 나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경쟁 기회라도 주어지는 것에 기뻐하면서, 나는 그렇게 경쟁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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